#8. 런던 2014 (1)
마지막 여행지 런던. 런던에 대한 내 기억은 안 좋은, 그것도 매우 안 좋은 편에 속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1주일 정도 런던으로 어학 캠프를 간 적이 있었다. 날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우중충했고, 숙소로 잡은 호텔은 귀신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중후한, 나쁘게 말하면 소름 돋는 분위기의 호텔이었다. 벽마다 공포 영화 포스터가 붙여져 있었고 밤에 그 복도를 걸으면 공포 영화 한가운데에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튼 런던은 썩 좋지 못한 기억임에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런던을 여행지로 삼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지인들이 제일 좋아했던 도시로 런던을 뽑았고, 어린 나이에 제대로 즐기지 못한 곳을 성인이 되어서 제대로 즐기겠다는 마음이었다.
런던 시내에 도착한 건 초저녁이었다. 니스에서 늦은 오전에 출발해 히드로우 공항에 도착한 뒤, 기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와 숙소에서 짐 정리를 하다 보니 시간이 훅 흘러갔다. 저녁이라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었다. 그래도 단 한 가지 활동으로 하루를 알차게 보내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뮤지컬을 보는 것이다. 원래 런던에서 뮤지컬을 보기 위해서는 예매를 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현지인들은 뮤지컬가가 들어선 피카딜리 서커스에서 현장 구매를 하기도 하지만, 이제 막 런던에 온 내가 그런 방법을 취할 수 있기란 무리였다.
물론 그것은 현실로 일어났다. 보고 싶은 뮤지컬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무작정 가서 시간 맞는 표를 구할 셈이었다. 간단하게 차려입은 뒤 지하철을 타고 피카딜리 서커스로 향했다. 런던의 지하철 카드인 '오이스터 카드'를 사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역에 도착해서 본 광경에 잠깐 혼란이 왔다. 형형색색의 네온사인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게 내가 알던 런던이라고? 우중충한 분위기에 축 쳐진 공기의 그 런던은 온데간데없었다. 도대체 내 기억이 잘못된 건지 런던이 13년의 시간 동안 변한 건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생동감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여태까지 들렀던 유럽의 그 어떤 도시보다도 활기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지하철 역 입구에 가만히 서서 한동안 너털웃음을 지었던 것 같다. 어떻게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 걸까. 런던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렇게 오지 않았더라면 내 기억 속의 런던은 항상 그 우울한 모습 그대로였을 것이다. 그렇게 기억되기에는 이 공간의 생명력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적응 안 되는 런던의 거리를 잠시 즐기다가, 근처에 보이는 매표소 같은 설치물을 찾아다녔다. 내가 알아본 바로는 극장에서 표를 사는 게 아니라, 거리에 있는 매표소 같은 곳에서 표를 살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 위주로 찾다 보니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고, 나는 그중에서 지금 시간대랑 가장 맞는 레 미제라블을 구입했다. 한 번쯤은 실시간으로, 그리고 원어로 접하고 싶었던 뮤지컬이었다. 소설이야 당연히 읽었고, 영화로 개봉한 뮤지컬을 본 게 다였기에, 뮤지컬의 본고장에서 직접 보는 감동은 또 다르겠지 하는 기대감에 충만해 있었다.
한국에서는 한 공연장 내에서 다양한 뮤지컬을 한다. 원래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는 한 극장당 단 하나의 뮤지컬을 한다고 한다. 언뜻 보면 비효율적인 운영 아닌가 싶은데, 오히려 이런 시스템이기에 그 극장을 해당 뮤지컬을 위한 특화된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에 '아 본고장은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무대에도 장인정신이 깃들었다는 뜻 이리라.
공연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서 근처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그중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엠엔엠 매장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내 달콤함을 책임져준 그 브랜드를 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직접 들어가 보니 어마어마한 양의 초콜릿들이 매장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색마 저도 형형색색이라 입맛을 자극했다. 마치 어릴 때 읽은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 있는 오색빛깔의 초콜릿들을 마법의 주머니에 담아 두고두고 먹고 싶었다.
사실 유럽 여행을 오기 전만 해도 달콤한 것들에 대한 내 욕구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탄불, 인터라켄, 파리를 거치며 내 입은 달달한 것에 적응한 것을 넘어, 갈망하게 됐다. 참새가 어찌 방앗간을 지나치랴. 매장에서 나눠주는 봉투에 수 십 알의 초콜릿을 담아 가방에 넣고 매장을 나섰다. 아마 한 번에 과자에 이렇게 많은 돈을 쓴 건 이때가 여전히 부동의 1위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주변이 매우 어수선했다. 몇몇 사람들의 환호성도 들리는 듯싶었다. 직감했다. 이건 분명 어떤 셀럽이나 행사가 있을 때 들리는 함성소리였다. 소리의 근원지를 따라가다 보니 레드 카펫이 보였다. 심상치 않아 보였다. 어쩌다 들른 런던에서 세계적인 탑스타를 보게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렀다. 한국에서 연예인을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른 설렘이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귀동냥해보니 무슨 영화의 시사회라고 한다. EXODUS라는 영화. 얼핏 한국에서 이 영화의 예고편을 본 기억이 난다. 성경의 출애굽기와 모세의 내용을 다룬 영화로 기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주연 배우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배우인 크리스천 베일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떠올리자마자 관중 속으로 파고들었고, 보안 문제 때문에 가까이는 갈 수 없었지만 크리스천 베일을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다. 다크 나이트 시리즈 때문에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배우를 눈앞에서 본다는 건 생각보다 큰 감동이었다. 심지어 그는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 반열에 있는 사람 아닌가! 월드 클래스 배우를 실제로 봤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보람 있는 하루였다.
그 자리에서 더 머물고 싶었지만 슬슬 뮤지컬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아까 봐 뒀던 극장으로 가서 뮤지컬을 관람했다. 뮤지컬을 관람하고 난 뒤, 이후에도 런던에 머무는 동안 하루에 한 공연씩 봤는데 이때 느낀 한국 뮤지컬과 외국 뮤지컬의 차이가 있다. 어찌 보면 각 국가가 생각하는 '가창력'과도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는 보편적으로 가창력의 기준이 폭발적인 고음이다. 물론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다른 나라보다도 고음에 열광하는 경향이 있다. 인기 있는 팝송과 국내에서 차트를 휩쓰는 노래들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물론 글을 쓰는 2020년 지금에는 그런 경향이 많이 줄어든 것 같지만, 적어도 2014년 당시에는 그랬다. 이는 뮤지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국내 뮤지컬에서는 고음을 안정적으로 내는 그런 격렬한 스코어가 인기가 많고, 외국에서는 톤과 그 분위기를 살리는 스코어가 인기가 많다. 물론, 국적을 불문하고 훌륭한 배우들은 두 가지 모두에 출중하시다.
아무튼 귀와 눈, 그리고 마음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시간은 벌써 11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사람들로 붐비던 피카딜리 서커스도 이제 슬슬 한산해지고 있었다. 런던에서의 짧은 반나절이었지만, 이 반나절만으로도 어린 시절 악몽 같았던 1주일을 잊게 하기에는 충분한 날이었다.
사실 런던에서의 일정은 5일이라는 시간으로 매우 긴 일정이었다. 하지만 긴 여행의 고질적인 특징일까? 이때부터 슬슬 한국이 그리워졌던 것 같다. 한국 음식은 절대 먹지 않겠다는 맹세도 깨버렸고, 숙소 안에 누워서 쉬는 날도 많아졌다. 때문에 찍은 사진도 별로 없고, 특징적인 날을 제외하고는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심지어 사진을 봐도 이게 어디서 왜 찍은 사진인지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여행에 맛들 린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본다면 어쩜 이러냐고 타박을 줬을 것이다. 그러나 초보자는 초보자일 때 가장 즐거운 법. 그때의 아쉬움이 있기에 지금의 여행에서 가하는 노력도 있기에 감사한 경험이었다. 이제 유럽 여행기에서 남은 글은 단 두 개. 여행 마지막까지의 기억을 쥐어짜 내며 글을 이어 나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