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에서 게임 기획자까지

꿈을 이룬 몽상가 #Level 4

by 스토리텔러

고등학생, 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하다


기획자, 특히 나 같은 콘텐츠 기획자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소중한 소재들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기획해야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대로 기획하고 싶은 것들을 항상 마음에 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런 비장의 무기가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 고등학생 시절에 창조되고 여태까지 정제되어 온 소재들이다. 그 이야기들을 언젠가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꿈을 꿀 수 있었다.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정리하는 데에만 A4용지 수 백장을 썼던 것 같다. 부모님께는 공부하는 척하면서 A4지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나갈 때 내 존재 의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세계의 창조부터 수 천년이나 되는 기간 동안의 역사, 그 와중에 등장하는 수백 명의 사람들에 대한 설정을 하나도 대충 쓰지 않고 심혈을 기울여 작성했다. 조악한 그림 실력으로 등장인물들의 인상을 하나하나 그려나갔고,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곳엔 어떤 장소들이 있는지를 그려나갔다. 그리고 나 스스로 그 안에서 벌어질 이야기에 감동받고 심취하기도 했다.


와중에 느낀 건, 상상력만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생각을 그림 혹은 글로 풀어내는 것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고, 막상 풀어내면 생각도 못 했던 어려움들에 자주 봉착하고는 했다. 가상의 세상 하나를 만드는 것도 이렇게나 어려울 줄은 이때 처음 알았다. 즐거워하는 일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흥미를 잃고 때려치웠을 것이다.


이런 시간들이 길어질수록, 내가 만든 세계를 사상에 더더욱 알리고 싶어 졌다. 하지만 한국에 사는 고등학생에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학교와 학원을 반복하는 삶 속에서 창작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했다. 따로 어떤 활동을 통해 이 이야기들을 상품화시킨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다는 현실이 주는 괴로움은 상당했다. 점점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괴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른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건 분명 축복받은 일인데, 그것을 떠올릴수록 힘들어진다는 게 모순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억지로 마음을 죽였던 것 같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면서 나 자신을 채찍질했고, 더 나아가서는 나는 다른 걸 원한다고 자기 부인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고3이 되면서, 찬란했던 내 꿈과 희망은 세상이라는 벽에 부딪혀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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