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이룬 몽상가 #Level 8
경영학도. 입 밖으로 꺼내기에도 민망한 말이다.
내가 입시를 치르던 2010년대 초반에는 '문송합니다'라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문과에서 대다수가 희망하는 학과는 경영학과였다. 나 역시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의 범위에서 가장 선호되는 학과인 경영학과로 진학했다. 딱히 경영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아마 동기들 중 절반 이상이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을 거라고 장담한다.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에게 가장 넓은 길을 보여주는 학과. 실제로 상경계 우대라는 기업들의 채용 공고를 보면, 경영학과는 확실히 취업시장에서 고를 수 있는 폭이 넓은 학과인 것 같다. 문제는 나에게 하고 싶은 일이, 그것도 매우 확고한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경영학이랑 썩 가까운 일은 아니었다.
먼저 게임 기획자가 되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지 혼자 고민에 빠졌다. 게임 기획자가 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는, 시간이 흐름 지금에도 생각보다 알려져 있지 않다. 업계에 아는 사람도 없었던 나는 순 나만의 사고 흐름에 따라 훌륭한 게임 기획자가 되기 위한 조건들을 나열했다. 정확히는, 훌륭한 게임 pd가 되기 위한 조건들을 나열했다. 최종 목적은 pd였고 기획자는 그 발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원활한 의사소통이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건 정답이었다. 현업에 와서 일하면서 기획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조건 중 하나가 뛰어난 의사소통 실력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활한 의사소통을 가장 중요시 여긴 요지는 이랬다. 기획자는 게임을 기획하고 이를 프로그래머, 그리고 아티스트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오갈 것이고, 이 이야기들을 잘 정리하고 전달해야 훌륭한 게임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 내가 생각한 건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이해할수록 의사소통이 수월해진다.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 상대방이 아는 것을 같이 알아가면 된다. 같은 것을 보고 알아간다면 분명 생각의 결도 어느 정도는 비슷해질 것이다. 그 순간 막힘없는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그 길로 컴퓨터공학 복수전공을 신청했다. 아티스트도 중요하지만 프로그래머 역시 게임 개발의 중추를 담당한다. 내 기획을 구현시켜줄 프로그래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학문을 공부할 필요가 있었다. 복수전공 신청은 아주 쉽게 승인이 났고, 나는 경영학도이자 컴퓨터공학도가 됐다. 사실 고생길의 시작이었다. 본전공인 경영학과는 서울 캠퍼스에 있었고, 복수전공인 컴퓨터공학은 수원 캠퍼스에 있었다. 앞으로 3년이라는 시간을 서울과 수원을 오가며 수업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내 고난의 대학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건 사설이지만 사실 지금도 놀라는 게, 내가 이렇게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지 1년 만에 전국적으로 코딩 바람이 불었고, 컴퓨터공학 복수전공 및 전과 경쟁률이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다. 의도치 않게 선견지명을 발휘한 나 자신에게 가끔은 뿌듯해지고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