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이룬 몽상가 #Level 12
이상과는 많이 달랐지만, 여전히 게임 만드는 것은 즐거웠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몇 시간 동안 설전을 벌이다가 의견에 합치가 일어나, 완성된 기획안이 나오는 것도 즐거웠다. 밤늦게까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고군분투하여 원하던 것을 완벽히 구동시키는 것도 매우 보람찬 경험이었다. 회사가 월 단위로 성장하는 게 보였기에, 그리고 내가 거기에 확실히 기여하고 있다는 피드백도 있었기 때문에 뿌듯한 감정도 충만했다. 1년 사이에 참 많은 쾌거를 이루어냈다. 세계적인 기업인 G사, I사, 국내 대기업인 N사 등등으로부터 파트너십 체결 제안이 들어오고 회사 역시 급속도로 성장해서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는 점점 짙어져 갔다. 스무 명으로 시작한 회사를 육십 명으로 키우는 것에 성공했지만, 그동안 그 스무 명은 자신들의 인생을 회사에 갈아 넣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루 평균 근무 시간이 12시간이었고, 주말에도 회사에 나와 최소 8시간 이상 근무하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이 모든 과정이 즐거웠다. 내가 낸 결과물이 힘이 되어 회사에 기여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고, 그 영향력으로 내 발언권과 신망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삶은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11월 초 무렵, 주중에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어 누군가를 안 만난 게 다섯 달 동안 지속됐다. 심지어 주말에도 밖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은 게 까마득했다.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맛있는 걸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걸로 에너지를 충전하던 나였다. 가끔씩 혼자서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가 이쁜 것들을 보고 혼자 사색하는 것 역시 내 삶을 재충전해주는 원천 중 하나였다. 이 모든 것들을 못한 지 반년이 가까워질 무렵, 어느 날 문득 스마트폰의 사진첩을 열어봤다. 마지막 사진이 4~5개월 전인 것을 발견한 순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성공에 취해 앞길만을 바라보다가 주변에 있는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주중에 가족들 얼굴 보는 시간이 고작 20분이었다. 아침에 함께 밥 먹고, 집에 들어가면 이미 시간은 새벽 1시. 집은 잠만 자는 공간이 되어있었고, 막바지에 가서는 아예 회사에서 자는 날도 허다했다.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취업한 탓에, 친구들이 취준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들을 단 한 번도 보듬어주거나 위로해준 적도 없다. 애초에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던 것 같다. 갑자기 주변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내가 과연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나라는 의문까지 들었다.
나는 행복하지 않다.
애초에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이 업계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막상 나는 지금 이 일을 즐기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행복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 일을 내가 왜 하고 있는 걸까? 내 일에 쓰이는 용어를 빌리자면, 기획 의도와 맞지 않는 기획안이 나온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다.
야근과 주말 출근으로 몸이 피폐해져 가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단 하나, 내가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항상 행복할 수도 없고, 좋아하는 것도 일이 되면 즐겁지 않다. 그러나 당시에 내가 느꼈던 불행함은 '일'을 함에 있어서 오는 게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내 태도와 행동에서 오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문제였다. 이 삶의 궤도에서 잠시 벗어날 필요성이 있었다.
마침 휴학 기간인 2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원래는 회사를 다니면서 학교에 복학해 막학기를 지낼 예정이었지만, 회사를 다 내려놓고 유종의 미를 장식하기로 결심했다. 바쁜 일정 때문에 미뤄뒀던 해외여행도 가고 싶었다. 막상 퇴사한다고 생각하고, 그 뒤에 할 것들을 떠올리니 삶이 갑자기 행복해졌다. 직장인들이 퇴사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걸 온몸으로 공감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그 길로 대표에게 퇴사 의지를 내비쳤고, 11월 22일, 나는 인생 첫 퇴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