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이룬 몽상가 #Level 14
2020년의 즐거웠던 상반기가 지나갈 무렵, 나는 다시 취준을 시작하게 됐다. 사실 큰 감흥은 없었다. 2년이라는 경력이 있기 때문에 어디서든 쉽게 취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나친 자만이었다. 삶에서 나를 스트레스받게 하는 게 없어서 그랬던 걸까? 좋게 말하면 자존감이 하늘같이 치솟았고, 나쁘게 말하면 대책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던 것 같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이 강했기에, 업계를 바꿔볼까라는 마음도 생겼다. 제일 처음 시도했던 건 웹툰 계열이었다. 워낙 웹툰을 좋아하기도 했었고, 5년 이내에 한국 웹툰 시장이 해외 시장도 석권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한국에서 생산하는 수많은 미디어들이 웹툰 기반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인사이트도 있었다. 이렇게 태동하는 업계에서 내 커리어를 쌓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다. 스토리를 좋아하던 꼬마가 당연히 할 법한 생각이었다. 매체만 다를 뿐, 웹툰 역시 게임처럼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라 큰 차이가 없다고 확신했다. (실제로 이 이후로 '경이로운 소문', '스위트 홈', '승리호' 등을 포함해 웹툰 원작 미디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스타트업에서 경험을 쌓는 건 2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중견기업과 대기업 이상만을 노리기로 했다. 처음으로 시도한 곳은 네이버 웹툰이었다. 하루에도 네이버 웹툰에 쏟는 시간이 한 시간 이상이나 되는 열렬한 독자였다. 이런 내 열정을 담아서 공개 채용에 도전했고 당당히 서류에 합격했다. 이때만 해도 모든 것이 잘 될 줄로만 알았다.
내가 즐기는 일에 열정을 다한다면 역시 다 되는구나!
하지만 취업을 해야 된다는 생각, 그리고 서른이라는 내 나이에 너무 매몰되어 버린 탓일까? 내 마음 한구석에서 이상한 생각이 싹트길 시작했다. 예전에는 취업보다는 내 자아실현이 더 우선이었다. 그랬기에 회사에 지원을 할 때도 내 소신을 꿋꿋하게 지켰다. 오히려 그런 자신감과 지조가 내 취업의 비결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네이버 웹툰 지원을 시작으로 나는 취업이 목적이 되어버려, 나 자신을 회사에 맞추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는 필요한 과정이긴 하나, 그게 도가 지나쳤다. 나만의 색이 사라진 것이다.
면접은 당연히 떨어졌다. 내 소신대로 진행했던 면접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아쉬움이 남았다. 뒤이어 진행했던 카카오 페이지 웹툰 역시 서류 전형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있었다. 계속 떨어져서 그런지, 더더욱 취업에 목멨던 것 같다. 그래서 나랑 관련도 없는,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 이런 시기 아니었으면 있는지도 몰랐을 기업들의 서류 전형에 지원서를 내기 시작했다. 그것도 대기업들만 골라서.
삼성 물산, LG 판토스, SK하이닉스, 카카오, 등등 취준생이라면 누구나 꿈꿀 법한 곳들이었다. 붙을 리가 없었다. 게임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게임 외길인생의 스펙이 다른 취준생들보다 좋을 리가 없었다. 영화나 소설에서나 벌어질법한 드라마는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은 역시나 노력한 자들에게 달콤한 열매를 주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공평한 세상이랄까.
가고 싶지도 않던 곳들에 지원한 건 악수였다. 그것도 상당한. 아무리 갈 생각이 없었다 할지라도, 연달아 탈락했을 때의 정신적 타격은 예상외로 컸다. 긁어 부스럼이었던 것이다. 이런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 후에는 게임 업계 쪽에도 여러 곳에 지원했지만 안 좋은 소식들만 가득했다. 그토록 자신감 넘치던 게임 업계에서도 나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가뭄에 콩 나듯 연락이 오는 곳이 있긴 했지만, 더 이상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으로 취업할 마음이 없던 나는 그 연락들을 거절했다.
그렇게 9월이 다 될 때쯤,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나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이었구나.
이런 생각이 매일매일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잘 때마저도 이 생각 때문에 잠에 들 수 없었다. 가족과 주변 친구들은 더 나에게 맞는 곳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얘기했지만, 나이 서른에 내 처지를 바라보니 암담하기만 했다. 주변 동년배 지인들이 결혼하고 애를 낳는 걸 보면서 초조함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이대로 내 인생은 내리막길로 치닫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나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