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쿠알라룸푸르 2018 (1)
직장인이 되면 생전 안 하던 것도 흥미로워진다. 장소도 마찬가지다. 생전 안 가던 장소에도 관심이 생기고 가고 싶어 진다. 나처럼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그게 더더욱 크게 작용한다. 2018년은 내가 처음으로 회사를 다니면서 돈을 벌던 시절이다. 그랬기에 그 전의 여행은 가족 여행이 아닌 이상, '사치'라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내 사비로 가는 여행에는 예산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기에 비행기는 무조건 저가 항공, 숙소는 무조건 게스트하우스였다. 호텔에서 잔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직장인이 되고 월급이라는 것이 들어오니 생각이 바뀌었다. 소비 수준이 훨씬 높아지게 됐고, 관심 없던 소비에 관심을 두게 됐다. 대표적인 것이 호텔이었다. 사실 호텔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가족 여행 다닐 때는 무조건 호텔에서 자니까 그럴 리가 없다. 다만 혼자서 다니는 여행에서, 호텔에 묵는다는 건 나에게 돈 낭비로 다가왔다. 한정되어 있는 예산에서 호텔에 돈을 쓸 바에는 그걸 관광지 혹은 먹는데 쓰는 게 더 이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8년 가을 어느 날. 월급 쓰는 재미에 한창 맛을 들일 무렵, 여행 관련된 sns 게시판에서 한 사진을 봤다. 어째 대만 여행이랑 시작이 비슷한 거 같은데, 아무튼 상당히 아름다운 사진이었다. 화려한 빌딩 숲 사이에 있는 루프탑 수영장에서 도시의 야경을 즐기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보자마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예전에는 호텔에서 자는 건 생각도 안 해봤기에 그냥 넘겼을 사진이지만, 이제는 그걸 소비할 여유가 되니까 오히려 관심이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막상 찾아보니까 가격 역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월등히 낮았다. 난 사진 속의 그곳.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일주일 뒤가 추석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일주일 뒤 쿠알라룸푸루의 4성급 호텔이 1박에 터무니없이 싼 격에 나왔다. 더 나아가서, 때마침 쿠알라룸푸르 왕복행 비행기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낮은 가격대에 책정되어있었다. 이것은 계시였다. 계속되는 야근 지옥에서 추석에 해외여행을 다녀오라는 계시임이 분명했다. 난 일사천리로 모든 예매 과정을 하루 만에 끝냈다. 일주일 전 예약이라 무를 수도 없었다. 그만큼 가고 싶은 욕구가 강렬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전투적이었냐면, 좋은 사진을 남기고자 출국 3일 전에 미러리스 카메라를 구입했다. 여태까지 여행 다니면서 항상 아쉬웠던 점이 사진의 품질이었다. 사진보다 직접 보는 것이 가치 있지만, 결국 시간이 흐르고 남는 건 사진이다. 그런데 그 사진들을 다시 볼 때 화질이 안 좋거나 그러면 조금 속상할 때가 있다. 특히 이런 여행기를 쓸 때 예쁜 사진이 없으면 억울하다. 내가 느낀 그 아름다움을 평가절하시켜서 남들에게 선보이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DSLR까지는 아니더라도 초보가 쉽게 사용 가능한 미러리스를 구입해서 퀵 배송시킨 것이다. (덕분에 이 이후 나의 여행 사진들은 그 전 여행 사진들과 극명한 차이점을 보이게 됐다)
그렇게 일주일 만에, 여행을 너무 가고 싶었던 직장인의 여행이 시작됐다.
말레이시아는 그 시작이 대만과 매우 흡사한 여행지다. 무슬림 국가, 동남아시아 등등의 이미지가 섞여 있기에 선입견으로 가득한 곳이다. 다만, 대만에서 그런 선입견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달았기에 이번에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았다. 사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익숙한 나리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북미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무슬림 친구들과 많이 어울렸던 경험이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문화가 나에게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이스탄불에서도 무슬림 문화를 경험했기에, 오히려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만반의 채비를 하고 갔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말레이시아는 미지의 나라였다. 대만은 사실 동남아시아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말레이시아는 내가 처음으로 방문하는 동남아시아인 것이다. 화려한 도시 안에 숨어 있는 여러 가지 모습들을 내가 속속들이 알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기에 아는 것이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야경과 함께 빛나는 루프탑 수영장 사진 하나 보고 여행을 결정한 내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일단 공항에 내려서 콜택시를 타자마자 조금은 놀라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젊은 여성분이 히잡을 두르고 나를 반겼다. 무거운 캐리어를 대신 들어주시고 트렁크에 넣은 뒤, 나를 호텔까지 데려다주셨다. 한국에도 여성 택시 기사님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런데 타국에서, 그것도 여성 인권이 낮다는 인식이 지배적인 무슬림 국가에서, 젊은 여성분이 이렇게 멋지게 자신의 일을 해내는 것을 보고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은 가는 길 내내 여러 가지 질문을 하셨고 우리는 꽤 재밌게 호텔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에 고속도로에서 보이는 전기밥솥과 연예인 이승기의 광고 간판 때문이었을까, 심리적으로 이 도시가 조금 가깝게 느껴졌던 것 같다.
내 돈으로 처음 묵어보는 해외 호텔. 왜 많은 사람들이 사비가 아닐 때도 호텔을 택하는지 알 것 같다. 들어오자마자 '내 공간'이라는 게 느껴지며 알 수 없는 아늑함이 나를 감쌌다. 여태 혼자 다닌 여행은 거의 다 게스트 하우스였고, 굳이 게스트하우스에서 독실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도미토리를 썼었다. 그랬기에 나만의 아늑한 공간에 들어왔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고, 알게 모르게 사람들끼리 눈치를 보는 공기도 있었다. 물론 그 공기에는 많은 여행으로 인해 익숙해졌다. 하지만 호텔에 처음 들어오자마자, 다시는 남과 함께 공유하는 방은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렇게 아늑하고 편한데! 홀로 콧노래를 부르며 어깨를 들썩여도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렇게 말레이시아에서의 여행은 시작부터 최고조의 상태로 시위를 당겼다.
호텔에서 짐을 다 정리하고 나자, 벌써 저녁을 먹을 시간이 다가왔다. 첫째 날에 뭘 먹으면 좋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김밥천국이었다. 아, 진짜 김밥천국이라는 건 아니고. 말레이시아인들에게 김밥천국 정도의 위상을 가지는 식당에 가기로 한 것이다. 그만큼 대중적이고 누구나 즐기는 그럼 음식을 먹고 싶었다. 그 나라를 느끼고 싶으면 국민 음식을 먹어봐야 한다. 왜냐하면 각 나라의 국민음식에는 국민들의 사상, 생각, 습관 등등이 다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국민 음식이라는 건 오랜 시간을 걸쳐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그 음식에 그 나라 문화의 정수가 다 담겨있는 것이다.
학문적으로 볼 때 이것은 사실이나, 내가 이런 이유를 대는 건 그냥 그럴듯해서다. 말레이시아의 '말'자도 모르는 사람이 국민 음식 하나 먹는다고 그 나라에 대하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시에는 그냥 있어 보이는 척해본 거였다. 선택 장애에 걸린 사람에게 그럴듯한 이유는 언제든 환영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선택한 식당은 '마담 콴스'라는 곳이었다. 체인점이었고, 도심 속에 꽤 여러 지점을 보유하고 있었다. 메뉴 구성 역시 잘하는 몇 가지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김밥 천국처럼 여러 메뉴들을 적당히 다루는 식당이었다. 내가 찾던 조건에 완벽히 부합하는 곳이었다.
이곳이 한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간판들을 지나 마담 콴스에 도착했다. 오면서 느낀 거지만 여기는 그냥 서울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고층 빌딩들이 도심을 꽉 채우고 있었고, 길거리는 오히려 서울보다 훨씬 더 깨끗했다. 모든 무슬림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만난 무슬림들은 이웃에게 친절하고 준법의식이 매우 강했다. 그랬기에 이렇게까지 거리가 깔끔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메뉴판에 'MOST'라는, 제일 많이 팔린다는 음식을 아무거나 주문하고 먹었다. 첫 입을 대는 순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맛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내가 진짜 웃은 이유는 이 나라 역시 내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다. 여행을 많이 다녀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음식을 하나도 가리지 않는다. 단순히 국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말이다. 여태까지 여행을 다니면서 그 어떤 나라의 음식도 내가 '안 맞는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동남아 쪽은 향신료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고 다들 말하지만, 나에게 그건 먼 나라 이야기였다. 말레이시아의 김밥천국이 내 입맛에 맞다면, 내가 이 나라에서 못 먹을 음식은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미치자 환희의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여행의 반은 음식이라는 내 신념에 좋은 소식이었다.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 1일 차, 이름마저 어색한 이 도시에서의 내 여행은 아직까지는 호조를 보이고 있었다.
다음 일정은 쿠알라룸푸르의 트레이드마크인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전망대 구경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마천루인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의 전망대에서는 쿠알라룸푸르 전경이 보인다. 밝은 낮에는 저 먼 도시까지 보일 정도로 높은 곳이다. 하지만 그곳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예약을 해야 된다. 즉, 내가 가고 싶다고 아무 때나 막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첫날부터 야경을 보고 싶었던 나는 전망대 오후 9시 티켓을 예매했다.
분명 내가 예매를 한 사이트에서는 내 숙소로 티켓을 보내줄 거라고 했다. 그랬기에 나는 호텔에 들려서 안내 데스크에 문의했지만, 내 이름으로 수신된 티켓 혹은 우편물은 전혀 없다고 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온라인으로 티켓을 구매한 내역을 인쇄해왔기 때문이다. 설사 티켓이 없더라도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전망대 개찰구에서 나의 구매를 증명할 이 종이를 보여주면 땡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은 생각보다 혹독했다. 개찰구 직원은 티켓이 없으면 들여보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분에게 딱히 악의가 있는 게 아니라, 진짜 어쩔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티켓이 없으면 전자식으로 되어있는 입구 자체에 들어가지 못하는 형식으로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번 호텔에 전화를 했지만, 여전히 내 이름으로 온 티켓은 없다고 했다. 애가 탔다. 여태 잘 진행되던 여행이 갑자기 꼬이는 기분이다. 이 전망대 입장 가격은 꽤 나가는 편이다. 그리고 다른 날들은 이미 일정이 잡혀있어서 더 이상 전망대에 오르지 못한다. 마천루에서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중대한 문제였다. 갑자기 우울해졌다.
하지만 이런 내게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다. 체격 좋으신 관리인 한 분이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물어본 것이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그분은 내가 인쇄한 종이에서 티켓 구매 대행사의 번호를 알아내 직접 그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어떤 말이 오가는지는 몰랐지만, 다행히 그분이 영어를 사용했기에 대화 내용을 유추할 수는 있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이 신사분은 당신에게 정당한 돈을 주고 티켓을 구매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의 사정이 어떻든, 당신에게는 이 신사분이 타워에 입장할 수 있게 티켓을 전달해주는 게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혼선이 있었으면 당장 호텔에 뛰어가서 택시를 타고 이곳에 오든 어떻게든 방법을 취하십시오!"
상당히 격양된 말투였다. 결국 내 잘못은 아니고 구매 대행사가 실수한 부분이 있는 거였다. 내 이름을 이상하게 호텔에 보내서 호텔 직원분들도 나에게 우편이 온 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행사는 자기들은 호텔에 우편을 보냈으니 더 이상 도와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직원분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입장이었다. 직원분은 만약 이 신사분(나)이 티켓을 못 받아서 입장을 못하면 타워 측에서 당신네들 구매 대행을 막을 거라는 엄포까지 놨다. 이쯤 되니까 그냥 내가 죄인 된 느낌이었다. 괜히 낯선 이방인 한 명 때문에 싸움을 붙이는 게 영 마음에 불편했다.
하지만 관리인은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보시더니, 엄격하면서도 상냥하게 걱정하지 말라는 제스처를 하셨다. 그리고는 말하셨다.
"당신은 정당한 대가를 주고 티켓을 구매했어요. 그리고 이곳에 오기 위해 시간을 들이셨습니다. 당신이 신경 쓸 일은 티켓을 무사히 받아서 원하던 구경을 만족스럽게 마치는 것뿐이에요. 미안할 필요도, 고마워할 필요도 없어요, 그저 당신의 권리일 뿐이고 그걸 챙겨주는 게 내가 여기서 일하는 목적이에요."
아, 사람에게 빛이 난다는 건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일까. 인종이, 성별이, 나이가, 종교가 다르면 어떠하리.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 사람에게 무슨 말이 필요할까. 본인은 그저 본인의 의무를 다 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걸 직접 지켜내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은 사람들 모두 알고 있다. 문득 스트라스부르에서 나를 도와주던 신사분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결국은 사람이었다. 피부색이 어떻든 그냥 사람이 중요하다. 타국인이라고, 다른 인종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그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이 이렇게나 아름다워진다.
결국 나는 무사히 티켓을 받을 수 있었고, 간발의 차이로 전망대에 올라갈 수 있었다. 내려와서 그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 사방을 둘러봤지만, 이미 퇴근하셨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또 다른 타인에게 베풀어야 하는 빚진 은혜가 하나 더 추가됐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험과 전망대에서 눈이 즐거워지는 경험을 끝내고 나니 벌써 시간이 9시에서 10시 가까이 됐다. 이제는 대망의 루프탑 수영장을 즐길 시간이었다. 사실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 수영장에 한 번도 안 가봤다. 물론 사진으로 직접 보고 고른 곳이지만, 사진과 실물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있기에 내심 걱정도 했다. 호텔 자체에는 크게 만족했지만, 정작 이곳에 온 목적인 루프탑 수영장이 별로면 말짱 도루묵 아닌가.
하지만 다행히도 오늘 하루는 완벽하게 흘러갈 예정이었나 보다. 사진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공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명 때문에 에메랄드 색으로 빛나는 수영장, 저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그리고 당장이라도 땅에 꺼질 것만 같은 아름다운 밤하늘. 내가 꿈꾸던 모습 그대로의 공간이었다. 그려오던 환상이 가감 없이 눈앞에 펼쳐지면,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내가 이것 때문에 평생 연도 없을 줄 알았던 래시가드까지 구매했다. 벼르고 왔는데 꿈꿔왔던 것과 다르면 얼마나 속상하겠나.
최대한 사진을 찍을 만큼 찍고, 얼른 이 아름다운 공간에 몸을 던졌다. 확실히 파란색 벽들 가득한 수영장에서 노는 것보다 이렇게 멋진 풍경을 보면서 노는 게 즐거웠다. 왜 사람들이 도심 속 루프탑 수영장에 환장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렇게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혼자서 물놀이를 즐겼다. 남들은 불쌍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그 짧은 한 시간은 일주일간 기다려온 내 염원을 완성시키는 순간이었다. 그렇기에 전혀 외롭지도, 불쌍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내 환상이 충족되고, 진정한 말레이시아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인 것이다.
실컷 물놀이를 한 뒤에 방에 들어오면서 컵라면 하나를 샀다.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말레이시아에 한 번 다녀온 친구가 꼭 사 먹으라고 했던 라면이기에 사서 먹었다. 원래 수영한 다음에 라면 먹으면 천상의 맛을 내기도 하고. 예상대로 이 나라는 나와 입맛이 상당히 잘 맞는다. 원래 라면 국물을 잘 안 마시는 편인데 반절 가까이나 들이켜버렸다. 그러고 나니 벌써 밤 11시가 가까워졌다. 비행기를 타고 와서 바로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물놀이까지, 몸이 피곤하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안 그래도 내일 아침부터 투어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잠에 들었어야만 했다.
그렇게 낯선 동남아시아에서, 나는 따뜻한 기억과 환상을 품고 깊은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