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쿠알라룸푸르 2018 (2)
아침 일찍 일어났다. 쿠알라룸푸르 근교를 돌아보는 투어가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어난 뒤, 씻고 옷을 다 입고 깨달은 것이 있다. 투어는 오후 1시부터였다. 시계는 오전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부정적인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평소 자는 시간에 비해 거의 4시간이나 더 잤으며, 일찍 일어나서 그만큼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호텔에서 간단하게 빵 한두 조각을 먹은 뒤,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로 향했다. 타워 안에 있는 망고 디저트 맛집 '허유산'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원래 목적이었던 망고 디저트보다도 더 귀중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날씨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하늘에는 구름보다 파란색이 더 많았고, 그래서 그런지 하늘 아래 펼쳐진 건물들에는 밝은 하늘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특히,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하늘을 꿰뚫을 기세로 높이 솟아오른 두 첨탑은 보기만 해도 시원시원했다. 그 뒤로 흘러가는 구름들은 마치 높은 산맥을 에워싼 안개처럼 보였다. 날씨 좋은 날에 서울에서 롯데월드 타워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그 시원함을 동남아 말레이시아에서 느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내가 압구정이나 청담동에 와 있는 줄 알았다. 가로수길 못지않게 정갈하고 깔끔한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그 양쪽에는 아직은 오픈 안 한 세련된 카페와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었다. 사이사이에 세워진 가로수들은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손에 커피 한 잔을 들고 이 거리를 걷는 나를 상상해봤다. 완벽했다. 도심 안에 있는 공원에서 여유와 바쁨을 동시에 느끼는 그런 직장인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내 모습과는 썩 달랐다.
사실 이런 말하기는 미안하지만, 말레이시아라는 국가에서 이런 감성을 느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기대도 안 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선입견이라는 것은 참 무섭다. 나름 이때까지 꽤 많은 국가들을 여행해왔다. 정말 상이한 여러 문화권을 경험했고, 그곳에서의 실상은 상상하던 것과 항상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몸으로 직접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말레이시아라는 곳을 내 멋대로 재단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제 하루를 그렇게 즐겁게, 예상외의 감성에 젖어서 행복하게 보내 놓고서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이곳이 어떤 곳이라도 또 내 마음대로 단정 짓는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내가 여행을 계속 가게 되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나의 생각이 깨지는 과정은 즐겁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은 여행에서 그 재미를 찾고는 한다. 단지, 겉으로는 생각이 깨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새로운 것을 본다는 사실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그렇다는 얘기다. 지나치게 모든 것을 편견 없이 바라보면 그건 그거대로 재미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내 생각을 깨기 위해, 편협한 내 생각에 끊임없는 자극을 주기 위해 미친 듯이 여행에 몰두하는 것이다.
공원을 산책하다가 타워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온 뒤로부터는 거짓말 안 치고 이곳이 말레이시아라는 자각을 못 했다. 타워 안에서 흘러나오는 배경음이 무려 K-POP이었던 것이다. 길거리를 걷다 보면 들릴 법한 한국 가요가 타워 내부를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심지어 이때는 BTS 열풍이 불기 전이었다. 애초에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나중에 BTS의 소식을 들어도 크게 놀라지 않았던 것 같다. 이미 한국 아이돌 그룹의 인기는 세계 곳곳에서 조용히 열기를 더하고 있었다.
허유산에서 먹은 망고 3종 디저트는 매우 훌륭한 별미였다. 같은 재료로 만들었지만 미묘하게 다른 방식으로 요리해서 각기 다른 음식을 먹는 기분이었다. 대만에서 먹었던 스무디 빙수보다도 더 맛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조금 웃긴 이야기지만 한국에 와서는 일부러 허유산에 한 번도 안 갔다. 자칫 갔다가 현지의 맛과 너무 다르면 실망할 것이 뻔했기에 일부러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 남들이 들으면 유난 떤다고 하겠지만, 추억은 소중한 법이다.
마지막으로 올드 타운 화이트 커피라는 곳에서 기본 커피 한 잔을 구매했다. 올드 타운 화이트 커피라는 곳은 말레이시아의 국민 카페? 같은 곳이라고 한다. 사실 이곳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는데, 말레이시아에서 살았던 친구가 내 인스타를 보더니 이곳에 꼭 가라고 해서 간 것이다. 마침 아까 타워 밑에 있는 공원을 커피를 마시며 거닐고 싶었던 게 떠올랐다. 제일 기본 메뉴를 주문했고, 생각보다 엄청나게 맛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공원을 거닐었다. 이 커피를 추천해준 친구에게는 한국에 돌아가서 맛있는 밥을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와 공원을 걷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1시 가까이 다 됐다. 나는 서둘러 가이드와 일행들을 만나기로 한 곳으로 향했다. 오늘 투어를 가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7명이었다. 손님들을 태운 커다란 하얀 벤은 말레이시아의 행정 도시 푸트라자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 투어의 핵심은 반딧불이 구경이다. 쿠알라룸푸르 근교에 있는 쿠알라 셀랑고르라는 곳에서 반딧불이를 보기 위해서 이 투어를 신청하는 것이다. 가이드를 끼지 않고 관광객들이 자체적으로 가기에는 무리가 있는 곳이라, 여행객들 100명 중에 90명 이상은 모두 투어로 반딧불이를 구경한다고 보면 된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그랬기에 반딧불이를 보러 가기 전 일정에 있는 푸트라자야를 일종의 '시간 때우기'용 관광지라고 생각했다. 여행을 자주 가본 사람들은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대충 알 것이다. 인기 있는 관광지 프로그램에 덜 인기 있는 장소를 넣어 시간을 채우는 일종의 상술이다. 뭐, 사실 나쁘다고는 생각 안 한다. 현실적으로 프로그램 안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찬 여행지로 채우는 건 불가능하니까. 여하튼 결론은 푸트라자야에 대한 내 기대치는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는 것이다. 누가 행정도시에서 만족스러운 여행을 기대하겠는가? 서울에 있다가 갑자기 대전에 온다고 상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이른 오후, 오늘 내 편견은 또 한 번 깨지는 과정을 거치게 됐다.
벤에서 내리자마자 내가 본 것은 저 강 너머에 보이는 분홍빛 모스크였다. 다른 어떤 감정보다도 반가움이 앞섰다. 다른 여행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여전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스탄불이 떠올랐다. 이스탄불을 가득 채우던 그 모스크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의 첫 여행이자, 지금의 여행광인 나를 만들어준 부모님 같은 여행지다. 그곳에서 봤던 모스크를 이곳에서 보니 왈칵 그리움이 복받쳤다. 그리고 그때부터, 푸트라자야는 나에게 소중한 도시가 됐다. 그제야 내가 볼 수 없었던, 아니 볼 생각조차 안 했던 이 도시의 아름다움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블루모스크가 보고 싶었다. 마침 이름도 핑크 모스크로 비슷하다. 내부에는 내가 뜻을 알아볼 순 없지만, 딱 봐도 익숙한 양식의 문양들이 벽과 천장을 채우고 있었다. 심지어 구조마저도 비슷했다. 밖의 열기와는 관계없이 건물 내부가 주는 그 기분 좋은 서늘함도 여전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면 내 눈앞에 이스탄불이 놓여 있을 것만 같았다. 그 그리움과 아련함을 간직한 채 눈을 떴다. 설명할 수 없는 벅차오름이 내 안에 있던 소극적인 마음을 적극적으로 바꿔놨다. 가이드분이 주시는 자유 시간이 이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순간부터 내 발걸음은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이 장소를 훑기 시작했다.
푸트라자야 전에 본 모스크는 이스탄불이 유일했다. 그랬기에 모스크가 현대적인 건물들 사이에 껴있는 모습은 많이 봤어도, 이렇게 야자수들 사이에 놓여있는 모습은 처음 본다. 모스크 자체의 아름다움을 제쳐두고, 분위기만을 두고 비교하자면 솔직히 이곳이 더 예뻤다. 물론 여전히 블루모스크가 더 좋지만, 야자수와 모스크의 조합도 썩 괜찮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같은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요소들과 어우러지느냐에 따라 그 분위기가 색달라질 수 있음을 몸소 체감했다.
그렇게 핑크 모스크 외부를 즐기는 사이 자유 시간이 끝났고, 우리는 푸트라자야 유람선을 타러 갔다. 푸트라자야를 가로지르는 강을 유람하는, 조금 유명한 도시에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그런 유람선이다. 이 아름다운 행정 도시의 모습을 담기 위해 최대한 바깥 자리에 위치했다. 여기에 타서 방 안에 있는 건 여행에 있어서 막대한 손실이다.
사실 어디가 어딘지는 기억이 안 난다. 분명 유람선 내에서 간단하게 방송을 해줬고, 심지어 경청까지 했지만 기억나는 건 딱 하나다. 위 사진들 중 우측 아래에 있는 장소가 이곳에서 가장 집값이 비싼 곳이라고 한다. 마치 서울의 한남동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그 금액을 듣고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물가 수준이 이렇게까지 낮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돈 많이 벌어서 여기에 살아도 좋지 않을까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유람선에서 내린 뒤, 우리는 푸트라자야의 전경이 잘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도시의 전경을 사진에 담는 시간을 가졌다. 정말이지, 내 짧은 식견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정 도시'다. 마치 한국의 송도 같은 곳이다. 다만 조금 더 전통적인 관광지가 있는 곳이다. 단순히 메인 투어 코스에 곁들인 반찬 같은 곳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렇게 또 생각이 깨진 나는 가이드분의 안내에 따라 하얀 벤에 몸을 실었다. 다음 장소를 향해서.
다음 행선지는 샥티 사원이었다. 사실 이 사원은 맨 정신으로 구경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여기야말로 오히려 반찬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푸트라자야를 끝낸 뒤, 마지막으로 남은 주요 관광지는 원숭이 언덕과 반딧불이를 보는 셀랑고르 강이었다. 거기까지 가는데 벤으로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데 그 사이에 이 사원이 위치하고 있다. 그래도 동남아권에 왔는데 사원 하나 안 보고 가기 아쉬우니 들려서 나쁜 건 없는 곳이다. 다만 사원 하나 덩그러니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맥락상 조금 뜬금없는 경향이 있다. 사원 내부에 맨발로 들어가서 한 바퀴 쭉 돌아보는 건 신선한 경험이었다.
사원을 보고 난 뒤, 곧바로 원숭이 언덕으로 향했다. 사실 여기에 대한 내 기대감은 0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사실 강아지를 키우기 때문에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원숭이가 좋으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뭔가 더럽다는 인상도 있었고, 사람과 너무 비슷하게 생겨서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생기는 부분도 있었다. 아무튼 그냥 시간이나 보내다가 반딧불이를 보러 가기로 한,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언덕에 올라가 노을을 보자마자 사라졌다. '원숭이 좀 더럽고 싫으면 어때. 이렇게나 멋지고 아름다운 노을이 눈 앞에 있는데 말이야.' 내 머릿속에 울리는 생각이었다. 여태까지 수많은 노을을 봐왔지만, 이곳에서 보는 노을은 확연하게 특이한 부분이 있었다. 이렇게 토속적으로 예쁜 노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 노을이 특이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봤다.
첫 번째, 같은 노을을 봐도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바뀐다. 높은 곳에서 노을을 바라보면 확실히 그 고도에서 오는 광활함이 있다. 원숭이 언덕은 그 이름답게 꽤 높은 곳에 위치해있었다. 그랬기에 눈 안에 들어오는 하늘의 모습이 낮은 곳에서 바라볼 때랑 차원을 달리했다. 하늘이 너무 넓고 구름도 많아서 그런지, 노을이 평소보다도 더 커 보였다. 심지어 모여든 구름들이 마치 거대한 산맥처럼 보이는 착각까지 불러일으켰다. (사진을 보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바로 알아챌 것이다)
두 번째, 노을 아래 펼쳐진 울창한 삼림이 핵심이었다. 아열대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그런 나무들이 땅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마치 아프리카에서 노을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여태까지 대자연을 많이 봤다고 생각하지만, 아프리카에 다녀와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얘기한다. 진정한 대자연은 아프리카에 있다고.
아프리카 하면 그 유명한 디즈니 명작 라이온 킹이 있다. 저 노을 아래 있다 보니, 내가 라이온 킹의 세계에 들어와 해 지는 프라이드 랜드를 바라본다는 착각이 든다. 환상적인 착각이다. 심지어 이곳의 이름은 원숭이 언덕이다. 라이온 킹의 감초 같은 존재인 개코원숭이인 '라피키'의 고향이 이런 분위기 아닐까 싶었다. 이런 생각을 했던 이유는, 황홀한 노을에 넋을 놓는 사이 내 시야에 원숭이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원숭이 한 마리를 들고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싶었다. 그 유명한 라이온 킹 장면처럼 말이다. 주인공이 심바가 아니라 원숭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정말 저 자리에 있었다면 누구나 이런 욕구를 느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만큼 원숭이 언덕의 노을은 사람을 홀리는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원숭이들마저도 너무 멋지고 분위기 있어 보였다. 이런 걸 두고 '분위기가 다 했다'라고 한다. 분위기 때문에 함께 하는 사람이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그런 순간들을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원숭이 언덕은 원숭이들이 그렇게 보이게 하는 마법 같은 공간이었다.
내가 살다 살다 원숭이들로 마음이 치유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애견 카페나 고양이 카페에서 마음이 포근해진 적은 있어도, 원숭이 언덕으로 마음이 따뜻해질 줄은 몰랐다.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안 좋아했을 것 같은데, 막상 강아지를 기르다 보니 다른 동물들에게도 쉽게 호감이 가는 것 같다. 그렇게 아프리카 같은 노을을 원숭이들과 함께 감상했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노을을 바라보니 알 수 없는 유대감이 생기는 것 같다. 그 친구들도 노을이 아름답다고 생각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저녁을 먹으러 갈 시간이었다.
음식점은 맛보다는 접근성을 기준으로 선정된 것 같았다. 맛이 나빴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다만 반딧불이를 보러 가기에 용이한 위치에 있기에 고른 곳이라는 느낌적인 느낌이 왔을 뿐이다. 그래도 식당 바로 옆에 강이 흐르고 있었고, 식당 자체가 야외에만 좌석이 있었기에 노을 깔린 강을 바라보며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식후경이 아니라 식중경 아닐까? 함께 투어를 다니던 분들과도 어느 정도 말을 텄다. 하루 종일 예쁜 것들을 같이 보다 보니 마음이 처음보다 더 여유로워진 걸까. 나름 담소라면 담소를 나누면서 밥을 즐겁게 먹은 기억이 있다.
저녁을 다 먹고, 대망의 반딧불 시간이 다가왔다. 사실 꼭 이걸 보고 싶다는 것보다는, 남들이 꼭 가라고 했기에 신청한 것도 있었다. 남들이 다 가는 데에는 작든 크든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랬기에 그저 가이드분의 안내에 따라, 그분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반딧불을 보기 위해서는 나룻배에 타야만 했다. 기계식 배를 타면 반딧불이 놀라서 달아나기에, 사공분이 직접 노를 저어 나룻배를 운영하신다고 한다. 배를 타기 위한 나루터에 도착했고, 거기서 본 짙은 하늘이 내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여태까지 봤던 그 어떤 하늘색보다 몽환적인 하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노을이긴 노을인데 푸른색이 더 많았다. 분명 밤이었는데 검정보다는 푸름에 가까운 색이 하늘을 짙게 채우고 있었다. 분명 과학적으로 파고들면 다 이유가 있는 현상일 게 분명했지만, 그냥 놓고 봤을 때는 말이 안 되는 광경이었다. 저 멀리 노을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 분명히 밤인데, 왜 이 강 위의 하늘은 푸르다 못해 시린 걸까. 블랙아웃, 화이트 아웃은 많이 들어봤어도 블루 아웃은 처음 들어본다. 그런데 이상하다는 생각보다는 매혹적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름답다기보다는 매혹, 고혹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그런 색이었다. 짙은 파스텔로 꼼꼼하게 도화지 위를 문지른다면 이런 색이 나오지 않을까?
나룻배를 타기 위해 거의 삼십 분 가까이 줄을 서서 기다렸지만, 이 하늘을 보고 있자니 시간이 오히려 짧게 느껴졌다. 하지만 결국 시간은 다가왔고, 나와 일행들은 장난기 가득한 사공 분과 함께 나룻배에 올라탔다.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산스러웠던 나루터였는데, 나룻배에 타자마자 사람들은 귀신같이 조용해졌다. 혼자서 속으로 실소를 터트렸다. 사람들이 제일 말 안 듣는 것 중 하나가 조용히 하라는 것인데, 얼마나 반딧불이 보고 싶었으면 이렇게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을 유지하는지. 하지만 감사한 일이었다. 침묵이 내려앉은 강은 그 어느 강보다도 분위기 있었다. 오직 밤바람, 풀벌레, 그리고 수면 위를 가로지으며 나아가는 나룻배의 삐걱거리는 소리만이 전부였다. 한 공간 안에 이렇게 단출한 구성으로 소리가 채워지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기계 문명이 자리 잡기 이전에는 세상의 모든 강이 이렇지 않았을까? 불과 십 분도 안 되어서, 나는 저 먼 옛날 쿠알라 셀랑고르의 정취를 느끼고 있었다.
사실 이 시점에 와서는 반딧불 따위 상관없었다. 이렇게 나룻배를 타고 강을 가로지르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즐거웠고 운치 있었다. 이대로 투어가 끝난다고 해도 아무 불만을 제기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 정도로 이 적막한 나룻배 탐험이 내 맘에 쏙 드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사공분은 본 목적에 충실했다. 십여 분간을 이렇게 강을 유람하시더니, 우리를 슬슬 강가에 있는 수풀더미로 안내하셨다. 듣기로는 반딧불들이 주로 강가에 있는 수풀에 서식한다고 한다. 나는 아무 감흥 없이 수풀더미를 바라보다가, 앞에 앉은 일행분의 자그마한 탄성 소리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기 시작했다.
수풀더미에는 크리스마스 전구 같은 장식들이 달려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안 보일 정도로 미세했지만, 확실히 수많은 빛들이 수풀 더미에서 그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으나, 그 빛이 렌즈에 담기에는 너무 희미해서 노출값을 최대로 올려도 쉽지 않았다. 배가 흔들리기도 했고, 괜히 사진 찍는다고 버티다가 진짜 진귀한 경험을 놓칠 것 같아서 결국 포기했다.
사공분은 허리춤에 든 나뭇가지를 수풀더미에 들이대더니, 거기 있는 반딧불 몇 마리를 나뭇가지에 옮겨 우리에게 건네주셨다. 막상 팔에 놓고 보니 그 빛이 생각보다 밝았다. 반딧불은 우리가 무섭지도 않은지, 그저 그 자리에서 신나게 빛을 뽐내고 있었다. 어둠 속의 빛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실제로 표현된다면,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적절하다고 확신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저 작은 반딧불이 발하는 희망의 빛은 미세하지만 확실하게, 태동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 작음이 빛의 가치를 훨씬 더 소중하게 만들었다. 마치 디즈니의 한 장면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스펀에서 봤던 천등 축제가 어렴풋이 상기되는 순간이었다.
참, 기대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예상보다 너무 즐거웠던 하루였다. 사실 이렇게 투어라는 형식의 여행을 간 건 상당히 오랜만이다. 2014년이 마지막이었으니 무려 4년 만이다. 예전처럼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면 이렇게 꽉 차 있는 일정으로 투어를 가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금인 직장인이다 보니 시간을 경제적으로 쓰기 위해서 신청한 투어였다. 이 날 이후로 투어를 향한 내 인식이 조금 달라졌던 것 같다. 단지 시간뿐만이 아니라, 혼자 온다면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교통수단 등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투어를 신청한다면 그런 번거로운 부분들을 알아서 해결해주니 얼마나 편리한가. 이 날 이후로 매 여행지에서 최소 하루 정도는 투어를 신청했던 것 같다.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아래에서 상큼하게 아침을 열고, 푸트라자야에서 추억을 되새기고, 원숭이 언덕에서 대자연과 교감하고, 쿠알라 셀랑고르 강에서 어둠 속의 희미한 빛을 보며 가슴이 따뜻해진 하루였다. 겨우 둘째 날인데 이렇게나 즐거워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첫날 역시 사람으로 인해 마음 한편이 뭉클한 날이었는데, 둘째 날은 말레이시아의 자연이 내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내일은 어떤 것들이 내 마음을 뭉클하게 할까라는 기대감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즉흥적으로 말레이시아 여행을 결행한 나 자신의 머리를 토닥이며, 쿠알라룸푸르로 돌아오는 벤 안에서 기나긴 숙면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