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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텔러 Dec 28. 2021

잡생각을 몰아내는 모래 썰매

#6. 시드니 2019 (2)


에그 베네딕트로 하루 시작하기


 회사를 다니면서 체력이 약해진 걸 뼈저리게 느낀 하루였다. 호주에 온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만성 피로에 몸 여러 군데가 비명을 질러댔다. 딱히 예상한 건 아니었지만, 오늘 있을 포트 스테판 투어는 오후부터 시작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오전 내내 늑장을 부렸다. 이제 호주 여행도 사흘밖에 안 남았고, 이미 이곳에 완벽히 적응해버려서 첫날처럼 이곳을 다 섭렵하겠다는 열정도 이미 사그라든 게 한몫했다. 사실 오늘도 투어 말고 뭘 할지 전혀 생각해놓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구글 지도에 저장해놨던 시드니 맛집 리스트를 천천히 둘러보다가 'Two Good Eggs Cafe'라는 곳을 목적지로 정했다. 투어가 시작하는 장소랑도 인접해있었고, 그냥 제일 중요한 건 비주얼이 제일 호주 브런치스러웠다.


토스트 위에 아보카도, 연어, 그리고 계란을


 사실 아보카도를 그렇게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맛이 없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딱히 맛이 있지는 않고, 적어도 내 돈 주고 사 먹기는 꺼려지는 그런 음식이다. 아마 이날 호주에서 먹은 아보카도 에그 베네딕트가 내가 돈 주고 사 먹은 최초의 아보카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카페의 가장 상징적인 메뉴였기 때문에 시켰고, 역시나 후회는 없었다. 특출 난 맛이 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 언제 먹어도 질리거나 물릴 것 같지 않은 그런 맛이었다.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그 범위 내에서 입이 가장 즐거운 그런 맛. 아마 시드니에 살았다면 매일 아침마다 이곳에 들려서, 이 에그 베네딕트와 한 잔의 플랫 화이트를 즐겼을 게 틀림없다. 그만큼 훌륭한 브런치였다. 여태까지 다녀본 모든 여행지 중에서 브런치가 가장 훌륭하고 거를 타선이 없는 곳은 바로 호주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브런치를 다 먹고 유유자적하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투어 시간이 다가왔다. 사실 이 투어가 정확히 뭘 하는 건지 그 순간까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시드니에 오면 많은 사람들이 신청하는 투어라길래 신청했을 뿐이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어도 후회할 일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저 일정에 내 몸을 맡기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사실 이건 수많은 여행을 다니면서 익힌 여행의 기술 중 하나다. 엄청나게 대책 없는 수준만 아니라면, 그저 정해진 최소한의 일정에 나 자신을 맡겨보는 것. 매일을 이런 식으로 다닌다면 조금 곤란하지만, 하루 정도는 이런 식으로 보내는 게 그 여행에 있어서 큰 활력이 된다는 것을 자주 경험해봤다. 내가 갈 곳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모쪼록 좋은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아는 건 가끔 감동을 반감시키기도 한다. 사람은 보통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미지의 것을 마주할 때 더 설레고 감동받는 법이니까 말이다. 


 사실 다 변명이고, 아마 이 시점에 생각이 가장 많아졌던 것 같다. 퇴사하고 여행 오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퇴사하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이 침범하기 시작했다. 고민의 여파인지 이 날의 사진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진을 안 찍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진이 빈약하다. 아마 포트 스테판으로 가는 버스 내내 고민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돌고래와 사막


 오늘 하루를 단 두 단어로 요약하라면 그것은 바로 돌고래와 사막이다. 조금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오늘 내 카메라에 남은 피사체가 이 두 개 밖에 없다. 보통 여행은 출발, 여정, 그리고 목적지 도착 세 가지로 나뉜다. 여행 초반에는 이 세 가지 단계 하나하나마다 고유의 설렘이 존재하고 그 모든 순간을 즐기기 바쁘다. 하지만 여행이 장기화될수록, 그리고 한치라도 집중에서 벗어나게 되면 '여정'의 순간들을 만끽하지 못하게 된다. 그저 목적지에 도착해서 그곳을 감상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다. 이런 여행 역시 의미가 있지만, 여행의 모든 단계들을 깊이 음미하던 나에게 있어 오늘 하루는 '여정'이 아예 사라져 버린 하루였다.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바다에 보이는 돌고래와 사막 두 개뿐인 걸로 봐서는 그랬던 게 분명하다.


상어인지 돌고래인지


 첫 번째 장소는 포트 스테판 크루즈 선에서 바라본 돌고래였다. 말 그대로 포트 스테판에 도착해서 크루즈에 탑승하고, 바다 한가운데로 가서 돌고래들이 주로 출몰하는 서식지에서 그들을 감상하는 것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엄청나게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돌고래들이야 이미 동물원 혹은 아쿠아리움에서 많이 봤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소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단지 돌고래들이 모이는 장소가 항상 일정하다는 것이 조금 신기했을 뿐이다. 위성 좌표가 몸에 장착된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항상 같은 좌표 인근에 모이는 걸까? 무수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돌고래를 다 보고 난 뒤, 어디 이름도 모를 식당에 들어가서 단출하게 식사를 했다. 흔히들 패키지여행을 떠나면 가는, 적당히 먹을만한 단체 뷔페식 레스토랑이었다. 패키지에 포함된 상품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가지 않을 그런 곳이었다. 오히려 생각이 많아졌던 게 다행이었다. 여행에 온전히 집중한 상태에서 이런 식당에 왔다면 기분이 썩 좋지 않았을 게 뻔했다. 정신을 여행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던 나를 위한 배려였을까? 다음 목적지인 안나 베이는 이런 내 마음을 시원하게 날려줬다.


사막


 사막과 관련된 이야기나 사진을 수도 없이 봐왔지만 정작 사막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안나 베이는 내 첫 사막이었다. 하지만 내가 평소에 알아오던 사막과는 사뭇 다른 장소였다. 일단 사막이 가지고 있는 '무더위'라는 것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시원한 반팔을 입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더위보다는 청량함이 몰아치는 사막이었다. 이게 진짜 사막이 맞나? 사막이 만약 이런 곳이라면 내가 여태까지 들어온 사막에서의 척박한 환경은 그냥 판타지였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 때쯤, 왜 사막에 이렇게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지 알 수 있었다. 안나 베이는 내륙 지방에 있는 사막이 아니라 해안가랑 바로 이어져있는 사막이었던 것이다.


 단순히 해안가랑 가까운 사막이 아니라, 바다와 아예 맞닿아 있는 지형이었다 언덕을 넘으면 바로 해풍이 불어오는데 안 시원할 리가. 어쩐지 공기 중에 소금 내음이 살짝 나는 것 같았는데 이 모든 것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영향이었던 것이다. 바다 옆이라는 걸 인식해서 그런지 몰라도, 시야에 보이는 아이보리색 모래 알갱이들마저 청량해 보였다. 원래라면 찝찝하고, 더럽고, 꺼끌꺼끌한 존재들인데 바다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시원하고, 깔끔하고,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모래는 처음부터 찝찝하고, 더럽고, 꺼끌꺼끌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구 옆에 있는지에 따라 성격이 상이해지는 사람과도 같이, 시원하고, 깔끔하고, 아름다운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모래 썰매


 안 그래도 시원한데 더 시원할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나 베이는 이렇게 아름답고 시원한 사막으로도 유명하지만, 진짜 하이라이트는 바로 썰매 타기에 있었다. 모래가 워낙 부드러워서 언덕에서 썰매를 타고 내려가는 액티비티가 성황이었던 것이다. 사실 투어에서 '모래 썰매'라는 걸 봤을 땐, '진짜 여행 상품이 얼마나 없으면 이런 걸 포함시킬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 자신의 무지함에 탄식했다. 사막의 언덕에서 타는 모래 썰매는 내가 여태까지 살아오며 탔던 그 어떤 썰매보다도 재밌었다. 물론 올라가는 길이 매우 매우 험난해서 땀이 뻘뻘 흘렀지만,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모래 언덕 밑으로 내려가는 즐거움이 다른 모든 불편함을 상쇄시켰다. 필연적으로 모래 알갱이가 바지 속을 헤집어놓았지만, 그런 것들은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원래는 예의상 한 번만 타려고 했지만 한 번 타고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거의 다섯 번 정도를 탔던 것 같다. 덕분에 다 타고나니 허벅지가 후들거리긴 했지만...


 썰매를 타고 내려가며 오늘 있었던 잡생각들이 다 날아가버려서 신난 걸까. 아니면 그냥 이런 원초적인 오락 행위가 너무 즐거워서였던 걸까. 나답지 않게 함께 투어를 하던 낯선 분께 카메라를 부탁하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여행 가서 먼저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한 게 다섯 번도 안 되는 내게 있어 이건 굉장히 이례적인 사건이다. 저 푸른 하늘과 찬란한 모래로만 가득한 세상 속에 담기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했다. 나 역시 품앗이처럼 내 사진을 찍어준 분의 사진을 찍어준 뒤, 이걸 계기로 우리는 말을 트게 됐다. 덕분에 안나 베이에서의 시간이 끝나고 시드니까지 돌아오는 길에 잡생각을 안 하고 대화로 그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다음날 가게 될 맛집 정보도 이때 알아냈다.)


상당히 마음에 드는 사진이다



갈무리하기


 시드니에 도착하니 벌써 해가 지고 저녁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또 맛집 지도를 켜서 근사한 식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오늘의 저녁은 소박하게 먹고 싶었다. 정확히는 굳이 맛집들을 검색해가며 이것저것 따지는 행위를 하기 싫었다. 안 그래도 잡생각들이 많아서 여행 내내 집중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웠다. 물론 나의 내면을 돌아보는 것 역시 여행의 순기능이지만, 내가 정한 시간에 그런 생각을 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내 계획 아래에 통제하려는 MBTI에서 J의 특징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냥 생각 자체를 그만두기로 했다. 보통 무언가를 질리게 하고 나면 그 행위가 더 이상 안 끌리기 마련인데, 내게 있어서 생각은 정반대였다. 생각에 꼬리를 물면 물수록 오히려 더욱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오늘 밤까지 계속 잡생각에 사로잡힌다면 내일마저도 여행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할 것이 눈에 선했다. 그래서 생각 그만두기를 실시했고, 마침 여행 다니면서 내가 의식처럼 행하는 행위를 못한 것이 퍼뜩 떠올랐다. 바로 그 나라의 맥도널드에 가서 그 나라에서만 파는 메뉴를 주문하기.


어두운 밤에 보이는 오페라 하우스와 시드니 항구


 지금 와서는 어떤 메뉴를 시켰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맥도널드에서 거하게 식사를 마쳤다. 가득 찬 배를 소화시키기 위해 어제 방문했던 시드니 항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낮에 바라본 푸른 하늘 아래 있는 오페라 하우스도 아름다웠지만, 밤하늘에 내려앉은 하얗게 빛나는 오페라 하우스 역시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두운 하늘과 검은 바다 위에 혼자 고고하게 떠 있는 흰 자태를 보자니, 마치 한 마리의 우아한 백조처럼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확실히 내 취향은 낮바다보다는 밤바다인 것 같다. 뜬금없는 망상이었지만, 세상 모든 장소에 밤이 내려앉아서 밤에만 보이는 그 모습들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실없는 상상을 한다는 건, 내 마음을 괴롭히던 온갖 잡생각들이 이미 사그라들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상념들이 갈무리되며 오늘 하루가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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