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시드니 2019 (3)
오늘은 늦은 오후쯤에 다시 멜버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가 있었다. 원래는 또 하나의 투어를 신청하고픈 마음이 컸지만, 자칫하면 멜버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놓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만 했다. 굵직한 일정을 보내기에는 모자란 시간이었기에 시드니 시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정을 찾았어야만 했다.
시드니에는 코스탈 워크라는 꽤 유명한 해안 둘레길이 있다. 제주도의 둘레길처럼 해안가를 걸으면서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길로 꼽힌다. 길이가 13km 가까이 되는지라, 딱히 한 지점을 특정할 수는 없고 산맥처럼 각 코스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실 이제 와서 떠올리면 어느 지점에서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커다란 풀장이 있는 장소에서 시작했다는 걸 사진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어제는 의도치 않게 여행 중에 잡생각들을 많이 했다. 사실 잡생각은 걸으면서 해야 제맛이다. 대략 2~3시간이나 걸리는 이 산책 코스를 걸으며 어제 잠시 접어뒀던 생각들을 하기로 했다. 탁 트인 바다와 아름다운 해안길을 바라보다 보면, 평소의 나라면 생각해낼 수 없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해결책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막상 생각을 하려고 마음먹고 걷다 보니 생각이 나질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해안길을 감상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날씨가 지나치게 좋았던 탓이었을까? 오히려 어제 방문했던 안나 베이 사막보다도 더욱 습하고 더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단순히 기분 탓은 아닌 것 같은 게, 걷는 내내 파리들이 주변을 맴돌아서 고역이었다. 현지인들은 이런 모습이 익숙한 건지 팔을 기계처럼 휙휙 저으며 이 길을 즐긴 반면에, 나는 기분 좋다가도 귀에서 '윙' 소리가 들리면 표정을 있는 힘껏 찡그린 채로 파리들을 쫓아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산책길은 내가 살면서 걸어봤던 산책 코스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으로 수렴하는 하늘과 바다가 마치 니스에서 봤던 푸른 지중해의 바다와도 닮아있었기 때문에 향수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시드니 도심에서 꽤 벗어난 곳이라 그런지 시내에서 보이는 고층 건물들이 안 보였다는 것이다. 오히려 좀 낙후된 건물들이 해안가에 즐비해서, 내가 지금 대도시에 있는 해안가를 걷는 건지 아니면 지방에 있는 고즈넉한 마을에서 해안길을 걷는 건지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산 토리니가 생각나기도 하고, 니스가 생각나기도 하고 참 여러모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었다.
코스탈 워크 중간중간에는 제주도처럼 여러 개의 해변들이 존재한다. 브론테 비치, 본다이 비치 등 시드니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들에서부터 이름도 못 들어본 동네 해변가 등등 다양한 모래사장을 만날 수 있다. 아직 방학 시즌이 아니라 그런지 소풍 나온 학생들도 보였다. 여유롭게 돗자리를 깔고 책을 읽는 사람도 볼 수 있었으며, 대낮부터 서핑을 즐기는 젊은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다. 마치 이 코스탈 워크 부근이 삶에 아무 걱정 없는 사람들이 모여 해변의 정취를 즐기는 천국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어디 자리를 잡고 앉아서 느긋하게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오후에 멜버른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이 무형의 압박이 되어 그 자리를 벗어나게 만들었다.
코스탈 워크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소는 대량의 묘비들이 늘어선 이름 모를 언덕이었다. 어림 잡아도 최소 수백 개는 될 것 같은 묘비들이 바다를 바라보고 고요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실 나는 아직 이런 장소를 가볼 기회가 많을 나이는 아니다. 기껏해야 한두 번 말고는 이렇게 대량의 '죽음'들이 모여있는 곳에 와본 적이 없다. 그랬기에 생소하면서도 신비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묘비 하나하나에도 사연이 넘쳐흐를 것만 같았다. 저 청명한 하늘 아래 있는 묘비들이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게 거대한 모순처럼 느껴지면서도, 생명이 순환하는 이치가 이 공간에 압축되어 한 폭의 그림이 된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2014년에 방문했던 생폴 드 방스에서 느꼈던 성스러움과 비슷한 결을 지닌 장소였다. 아마 한참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 같다. 시드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를 묻는다면 어처구니없게도 이 장소를 뽑을 것 같다. 아마 짧은 시간 동안 더 높은 차원의 공간을 경험했다는 사실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장소를 마지막으로 나의 코스탈 워크는 끝이 났다.
호주 여행을 오면서 했던 약속이 하나 있다. 바로 쿼카의 사진을 직접 찍어서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쿼카라는 동물을 잘 모르고 살아왔다. 그냥 해맑게 웃는 다람쥐처럼 생긴 동물의 사진을 인터넷에서 몇 번 봤을 뿐이지, 그게 호주에서 꽤 유명한 쿼카라는 사실은 모르고 지냈다. 호주를 간다는 내 말에 쿼카에 대해 알려준 친구가 아니었다면, 아마 호주에 와서도 쿼카를 못 보고 갔을 거다. 코스탈 워크를 끝낸 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페더데일 동물원으로 향했다. 사실 굳이 이런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 소중한 시간을 쓰지 않는다. 지금이 여행 막바지고 이제 더 이상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정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아침부터 꽤 긴 해변길을 걸어왔더니 배가 고팠다. 쿼카를 찍든 뭘 하든 일단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다행히 나에게는 이미 근사한 계획이 있었다. 시드니 항 근처에 사람들이 꽤 많이 몰리는 레스토랑을 눈여겨봐 뒀었다. 사실 저녁에는 갈 엄두가 안 났다. 나름 혼자 해외여행 베테랑인 나에게도, 저녁 시간의 시드니항 레스토랑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는 건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사람들이 덜한 늦은 오후 시간에 느긋하게 식사를 하려고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근사한 스테이크, 새우, 그리고 매시드 포테이토가 어우러인 Surf&Turf를 맛있게 즐기고 난 뒤, 페더데일 동물원으로 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했다. 이미 3일 차, 해외여행에 닳고 닳은 내가 한 도시의 지하철 노선도에 익숙해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구글맵으로 미리 찾아놓은 노선을 따라 기차역을 지나 페더데일 동물원에 도착하기까지는 금방이었다.
너무 쿼카 하나만을 바라보고 가서 그랬을까? 다른 동물들은 그렇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멜버른에서 펭귄 투어를 할 때 이미 동물원을 한 번 들려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내가 간 시간이 쿼카에게는 그리 활동적인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과장 하나도 안 보태고 대략 20분가량을 쿼카 서식지 앞에서 서성였던 것 같다. 쿼카들은 서식지 한가운데 있는 자신들의 집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름 강아지 두 마리를 키우는 입장이라, 어떻게든 그들의 시선을 끌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꽤나 이상한 방식으로 다시 한번 확인했던 시간이었다.
그래도 내 인내심이 가상했던 걸까? 어느 순간부터 쿼카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이 스멀스멀 집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그저 덩치가 제일 커서 우두머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주변에 있는 풀 쪼가리들을 찾아가며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아, 쿼카를 찍으러 왔으면서 막상 쿼카에 대한 걸 하나도 몰랐던 나를 질책했다. 나는 재빠르게 쿼카 녀석이 집중적으로 탐닉하는 나뭇잎 종류를 파악하고, 펜스 근처에 있는 비슷하게 생긴 나뭇잎들을 모조리 긁어모았다. 그리고는 이를 흔들며 쿼카의 시선을 끌었다. 성공이었다. 쿼카 녀석은 계속 내 주위를 배회하며 내 손에 있는 나뭇잎을 가져가려고 안달이었다. 나는 강아지들을 찍을 때 단련된 기술로, 한 손에는 카메라, 한 손에는 나뭇잎을 들어가며 내가 원하는 각도에서 쿼카를 마음껏 찍을 수 있었다. 여러 사진들을 찍었지만 위 네 개의 사진이 내 친구 마음에 제일 쏙 드는 사진이라고 한다. 쿼카의 속도감이 느껴진다나? 아무튼 그렇게 나는 바다 건너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쿼카와 씨름을 하다 보니 벌써 한 시간이 넘어갔고, 벌써 하늘 위에는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오늘은 조금 빨리 쉬고 싶었다. 하루 종일 걸은 것도 있고,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멜버른으로 가야만 했다. 이미 시드니에 더 이상 미련이 없던 것도 한몫했다. 사실 오페라 하우스 내부 투어를 신청할까 정말 많이 고민했지만,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굳이 여행지에 와서까지 마음에 있지도 않은 행위를 숙제처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이제 이미 익숙해진 기차를 타고, 익숙한 노선을 통해 숙소로 들어갔다. 가장 짧은 시간 동안 돌아다닌 하루였지만, 그 어떤 날보다 가장 길게 느껴진 시드니에서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