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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성 치매?

hCG, 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 (2)

by 돌장미

감사하게도 원하던 아이를 임신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불편함이 따르긴 했지만 입덧도 없었고 아기도 안정적으로 잘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큰 무리 없이 출근을 계속할 수 있었다. 법이 개정되어 임산부는 하루 8시간 이상 근무, 즉 법적으로 야근을 할 수 없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제조업 계열로 노동 시간 초과와 관련하여 한번 안타까운 일이 발생한 이후로 임직원들의 부당 초과근무를 철저히 단속하는 문화가 자리 잡혔기 때문에 업무량이 많은 팀이긴 했지만 칼같이 퇴근하는 나를 주변에서 아무도 나쁘게 보지 않았다. 처음으로 9달 동안 주 40시간을 넘기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참 고맙고 다행인 일이었다.


문제는 나는 워커 홀릭 기질이 있는 데다가 칼퇴근은 허락되었지만 이상하게 업무량은 줄어들지 않은 것에 있었다. 물론 한바탕 맘고생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하면서 찬찬히 생각해 보니, 업무량이라는 것은 남이 나에게 주는 부분도 있지만 스스로 조절하는 부분이 매우 크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알겠다. 그런데 열정이 덜 꺼진 그 당시 나는 고지식하게 열심히 일하는 부류였다. 누가 시켜서 하기보다는 일이 돌아가기 위해 책임감 넘치게 완성도를 높이는게 나의 일 철학이었다. 그렇게 일해서 충분한 보상을 받았냐면 심정적으론 전혀 그렇지 않다고 느끼지만 아무튼 보람이 없진 않았다. 일의 보람이 내 열정의 큰 추진력 중 하나였기 때문에 윗사람들이 나를 좋아했던 것 같다. 문제는 원래 내가 만들어 내던 일의 양과 완성도를 유지하려면 기존처럼 어느 정도 야근을 해야 하는데 야근이 금지되어 있으니 묘하게 몸은 편한데 업무 스트레스는 더 커진 느낌이었다.


어떤 업무는 주변 상황을 고려해 마감 기한이 갑자기 정해지게 되고 그 기한에 실수 없이 맞추기 위해선 야근이 필요하게 된다. 갑자기 설계 마감 일자가 나왔고, 설계를 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고 오류가 있는지 검토해 주는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설계의 완성도를 높이고 실수를 줄이기 위해 나는 하루 8시간 이상의 초과근무가 필요했다. 하지만 회사 원칙과 시스템상 그것이 불가능했다. "시간이 부족해서 기한 내에 완성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정도의 부드러운 말로 리더들에게 어필해서는 "어, 그래 정말 고생 많은 거 알지, 그래도 항상 그랬듯이 잘할 수 있을 거야.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정도 수준의 피드백 밖에 받지 못한다. "저 임신해서 야근 못하니깐 마감 기간 다음 달로 미루겠습니다."라는 말을 내입으로 할 수는 없었다. 물론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이해해 줬을 것 같다. 그런데 나 자신에게는 도저히 허락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기존에 하듯이 열심히 집중해서, 스트레스받으면서 했다.


설계에서는 정말 수천 가지의 실수가 발생할 수 있다. 모종의 절차를 통해 미리 예방할 수 있는 오류도 많지만 실물을 만들면서 발견되는 오류가 훨씬 많다. 그 오류가 대체 가능한 다른 방법으로 복원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최악의 상황 중 하나는 설계도를 다시 그리고 실물을 다시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이 발생해 버렸다. 정말 말도 안 되게 하찮은 설계 실수를 해버렸는데 공정 조건과 맞물려 실물에서 원하는 대로 잘 안 만들어진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참고로 나는 연구직이고 팀에 사람도 얼마 없어서 설계부터 실물 제작 및 특성 검증하는 것까지 그냥 내가 다한다. 설계를 하면서, 도안을 내보내고 하나하나 만들어 가면서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거의 마지막까지 왔을 때 현미경 검사에서 발견해 버리고 말았다. 있지 말아야 할 어떤 무늬가. 으악.


머리카락 한 올보다 훨씬 작은 틈인데 그 틈새가 문제였다. 설계에서는 있지도 않은 틈, 하지만 잘못 설계한 그 패턴. 설계 도안을 다시 보고 나의 실수를 확인한 후 눈을 질끈 감았다. 실수라는 단어로 내가 한 잘못을 격하하는 것도 기분이 썩 내키진 않았지만 어쨌든 너무 하찮은 오류인데 내가 의도하지 않았다. 마우스 클릭질에 삑사리가 난 느낌이었다. 정말 끔찍한 기분이었지만 이미 발생해 버린 일이므로 나는 원인과 결과 및 가능한 대응방안 등을 분석한 한 장의 자료를 만들어 파트리더에게 가지고 갔다. 합리적이고 포용력이 넘치는 파트리더님은 괜찮다고, 대신 설계 한 장 더 나가자고 말을 했다. 다행인 건 내가 맡은 일이 선행 연구 작업이었기 때문에 팀의 다른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았고 내가 벌인 일의 스케일이 크지 않아서 새 도안을 설계하는데 가장 최소한의 비용이 든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실책은 실책이고 설계 오류는 다른 실책에 비해 유난히도 눈에 띈다. 조용히 넘어가기 어렵고 기억에도 잘 남는 일이라 그런 것 같다.


팀 미팅 발표 때도 다행히 합리적인 성격의 팀장님은 나를 질책하지 않았고 어서 다시 잘하면 되겠다는 말을 해주었다. 나는 서둘러 일을 추진하여 결국 일은 끝까지 잘 마무리되어서 좋은 실물 특성을 확보했다. 그렇게 무난하게 잘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역시 팀 리더는 한 번은 지적을 해야 하는 존재인가 보다. 문제는 지적 방식이었다. 중간 면담 시간에 이 사건이 언급되었고 나는 질책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담담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내가 준비된 팀장님의 대사는 대략 "다음번엔 같은 실수가 없게 하라"던가부터 "나중에 고과에 영향이 있을 것이다"등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가 듣게 된 건 너무 내 뇌리에 박히게 되어 이 글을 쓰게 만든 잘 잊기 어려운 대사였다. "그동안 실수 한번 없었는데, 임신해서 그래?"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말이었지만 나는 평소처럼 차분하게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실수한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세상에 임신해서 그렇냐니. 팀장님의 말은 계속 내 머리에 맴돌았다. 임신해서 뭐가 어떻게 돼서 그렇냐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임신해서 (→ '지능이 떨어져서' 또는 '조심성이 떨어져서' 또는 '일에 관심이 떨어져서' 또는 그냥 '바보가 돼서' →) 그래?" 내 머릿속에서 계속 괄호 안의 말이 갱신되었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임산부들에게 미안했다. 내가 수많은 일하는 임산부들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 같았다.


어쩌면 팀장님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높은 농도의 hCG와 에스트로겐은 뇌의 기억력과 신체를 바꾼다고 한다. 그리고 종종 2년이 지나야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고 한다. 나는 내 몸속 호르몬 변화로 인한 임신성 치매를 앓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렇지 않다. 팀장님은 틀려도 아주 대차게 틀렸다. 누구 하나 실수 없이 팀이 운영되었다면 우리 팀이 매번 그렇게 시간에 쫓겨 허우적거렸을까? 그냥 남들 다 하는 휴먼에러 나도 한번 한 것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그냥 설계 업무랑 안 맞는 걸 수도 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별명이 덜렁공주였다. 극도록 꼼꼼함이 요구되는 설계에 손을 댄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나도 내가 휴먼에러를 저질러서 참 유감이다만 임신해서 그렇냐는 말을 들을 건 아니었다.


평소에 나에게 좋은 말만 해주던 나름 합리적인 인품의 팀장님이 이렇게 쉽게 잘못된 말을 할 수 있다니 놀라우면서도 다짐을 하게 된다. 나는 저렇게 쉽게 말하지 말아야지. 어쩌면 팀장님이 극강의 T라서 그런 말을 한 걸 수도 있다. "임신성 치매가 있다던데 너도 그런 거니?"라고. 하지만 같은 T로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남의 호르몬 변화에 함부로 말 얹지 말자는 것이다. 화가 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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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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