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 코르티솔
복직이 2주 남짓 남았다. 처음에는 나 홀로 육아휴직을 1년 하는 계획이었으나 남편과의 상의 끝에 내가 먼저 조기 복직하고 남편이 남아서 내년 봄이 되기 전까지 전업 육아를 하는 것으로 역할 분담이 되었다. 사실 그동안 인생에서 전례 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육아를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남편과 함께 공동 육아휴직을 했기 때문이다. 둘이서 하다 보니 육아에 무작정 지치는 일이 없어 아기에게 더 많은 사랑을 줄 수 있었고 우리 집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나는 처음으로 휴식을 맞은 기회에 브런치에 글을 작성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아기가 자는 시간을 쪼개서 수채화 그림도 그릴 수 있었다. 이제는 감사한 시간을 뒤로하고 삶의 새로운 챕터를 써나갈 때다. 남편과의 새로운 역할 분담은 아기가 처음 집에 왔을 때만큼 큰 변화로 다가온다. 지금까지 일 중독자로 일해오던 내가 가정과 일의 밸런스를 잘 맞춰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이전 글에서 취미 활동에 대해 언급하면서 나에게 도파민이 분비되는 취미가 없다고 적은 바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지 않은 사실은 이전까지 내가 일을 취미처럼 해왔다는 사실이다. 일 중독자들은 일을 취미처럼 하는 경향이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업무 시간을 늘리는 것부터 해서 업무 완성도를 올리기 위해 업무 시간이 아닐 때도 일생각을 하면서 일의 효율과 완성도를 끌어올릴 방안을 탐구한다. 나의 경우 제조업계 엔지니어이자 연구자로 일하다 보면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완벽한 기술은 없기 때문에 최대한 경쟁사보다 먼저 우수한 기술을 제품에 적용해서 세상에 내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속한 회사와 팀에서는 원한다면 워라밸을 매우 이상적이고 쾌적한 수준으로 맞출 수 있지만 코뿔소처럼 앞만 보고 회사에서 살다시피 일을 할 수도 있는 곳이다. 해야 할 일은 항상 쌓여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팀은 팀원 성향에 따라 개인별 근무시간이 천차만별이기도 하다.
임신 전까지는 포괄임금제에서 지정한 근로시간을 넘겨 따로 야근 수당을 받을 정도로 일을 많이 해왔다. 집에서는 잠만 자는 생활을 한동안 한 결과 몸과 정신 건강 모두 악화되었지만 성과는 좋았다. 여기서 말하는 성과는 기술적 성과이다. 과제 목표 달성이 어렵다고 판단되어 팀에서 포기하려던 목표에 고집스럽게 매달려 연구해 세계 최고 수준의 성능을 확보한 적도 있고 직접 설계를 시제품에 적용해서 만드는 공정까지 개발했다. 파트리더, 팀리더 모두 편애에 가깝게 나를 매우 아껴주었고 후한 칭찬이라는 당근으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
일을 통해 성과를 얻으면 도파민 분비로 인한 성취감, 보람, 쾌감이 뒤따른다. 그런데 이 도파민은 내 몸에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아주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일을 해내야만 그 끝에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평소에 오랜 시간 동안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에 내내 시달리고 나서야 간신히 도파민이라는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다. 코트티솔과 도파민이 균형 있게 작동해야 의욕이 있으면서도 스트레스에 잘 대처하는 건강한 삶이 가능한데, 나는 습관적으로 계속 더욱 강한 도파민 쾌감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코르티솔에 노출되어 결국 번아웃에 필연적으로 빠지곤 했다. 그로 인해 몸과 마음이 상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 도파민: 행복과 동기 부여를 주는 보상 호르몬. 기쁨, 보상, 성취감, 동기부여, 학습, 집중력 등에 관여.
- 코르솔: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생존 호르몬. 스트레스 상황에 대처하고, 에너지 공급을 조절하는 역할.
영혼을 쏟아부은 노동이 부질없다고 느낀 건 회사와 팀리더로부터 수차례 배반의 순간이 누적되면서이다. 제조업 강국이던 대한민국은 점점 중국에 추격당하여 조금씩 설자리를 잃고 있는데 우리 회사는 그 직격탄을 맞는 대표 회사다. 기업 규모는 크지만 악화된 경영 실적으로 인해 당장 돈을 벌지 못하는 연구직종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아무리 세계 최초 기록을 세우면서 온갖 기사에서 신기술에 대한 환호를 받아도 회사 내에서는 찬밥 신세를 면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입사 후부터 지금까지 그토록 많은 칭찬으로 나를 달리게 한 팀리더가 고과시즌 때마다 나에게 사과를 하는 일들이 발생했다. 팀리더는 합리적인 인품의 사람이지만 너무 강직한 바람에 더 윗선의 리더들로부터 그다지 애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게 원인인지 모르겠지만 팀리더는 항상 본인이 애써보았으나 그럼에도 나에게 걸맞지 못한 고과를 주게 되었다고 사과했다. 이렇게라도 말해주는 리더니 그나마 다행이라 볼 수도 있지만 입사 5년 차에도 큰 변화가 없으니 성과에 대한 보상을 못 받는다는 점에서 결국 나는 스스로 지침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팀리더는 고가의 비밀스러운 선물을 통해 개인적인 보상을 나에게 주고자 하였지만 부담스러운 마음만 가중되고 불만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팀에 남아있는 이유는 나의 박사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업계가 거의 없다는 점과 팀워크와 열정, 평등한 분위기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배려가 이만한 팀이 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또 각자의 일에 책임만 질 수 있다면 매우 유연한 근무가 가능하기 때문에 팀원들은 바쁜 와중에도 가정을 잘 챙기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사유들이 결국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나의 옹졸한 변명일 수도 있다. 모험과 안정을 택하라면 나는 항상 안정을 택해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팀에서 일하는 가장 큰 의의를 찾으라면 나와 비슷한 전공을 한 사람은 많지만 산업체에서 해당 기술에 대해 끝장을 볼 생각으로 연구를 사람은 극소수라는 점에 있다. 제품으로서 세상에 빛을 볼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야말로 엔지니어의 큰 자부심이 될 수 있다. 바닥부터 토대를 쌓아온 기술을 세상에 내보이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실낱같은 희망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복직 후 나는 더 이상 일 중독자처럼 일하지 않을 것임을 다짐한다. 물론 열정이 완전히 식은 것도 아니고 업무 스타일을 갑자기 변화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일과 삶의 균형을 잘 잡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나의 가정을 소중히 가꾸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더 이상 번아웃으로 나 자신을 황폐화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나의 몸과 마음이 소중해졌기 때문이다. 이토록 보편적인 마음을 아이와 함께하고 나서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예전에부터 실천 중인데 말이다.
새로운 마음가짐과 태도로 복직하는 나 자신을 응원한다. 비록 사람이 변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매일 사랑을 쏟고 싶은 나의 작은 아기를 생각하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