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렐린, 렙틴
임신과 출산을 한차례 거치며 체중이 증가했다. 다행히 입덧이 없어서 일상에서 이로 인한 불편함을 겪지 않았고 마음 편하게 태아를 위해 영양을 고루 섭취할 수 있었다만 임신 초반 엄청난 식욕과 식탐이 아찔하게 찾아왔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고 음식은 자제하지 않으면 끝없이 입으로 들어갔다. 밥이 너무 맛있었다. 계속 먹지 않으면 현기증이 나는 기분이었다. 어느 순간 임신이라는 핑계로 늘어난 체중을 설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20대 중반 이후 식탐으로 인한 체중 증가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에 임신 후 왕성한 식욕의 파도에 속수무책하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한 생명을 내 품에서 기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어느 정도 면책권을 가졌다고 느꼈기 때문에 지금 차오르는 배가 태아인지 나의 것인지 애써 외면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식탐의 죄로부터 비껴나갔다고 여긴 것이다.
물론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외모 자괴감이 찾아오지 않은 건 아니다. 거울 속 나의 모습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날씨 좋은 날 기분 좋게 산책하려고 원피스를 입고 남편과 외출을 했다가도 집을 나서기 전 확인한 거울 속 내 모습이 머릿속에서 가시질 않아 횡단보도 앞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집으로 다시 돌아온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매우 우습다.) 수많은 현대인들이 빠져있는 실컷 잘 먹고 허무해하는 행위는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의 호령 한마디로 끝이 났다. 임신 중기 사정이 있어 옮긴 병원에서 새로 만난 의사 선생님이 "살이 왜 이렇게 찌셨어요?"라며 건넨 꾸지람의 눈초리에 그날부터 나는 적게 먹고 슬퍼하는 또 다른 현대인의 함정에 빠졌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권위에 약한 편이기 때문에 2주에서 한 달에 한번 만나는 의사 선생님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식단을 최대한 당뇨환자의 식단에 맞추었다. 하지만 출산이 다가오면서 단단히 조인 식탐의 고삐가 느슨해졌고, 결국 최종적으로 임신 전 대비 체중의 십의 자릿수가 두 번 바뀐 몸으로 출산을 하게 되었다.
간혹 산후 조리원 기간이 끝난 후 20 kg 가까이 체중이 감소했다는 기적의 간증글들이 육아 커뮤니티에 올라오곤 했다. 그래서 포동포동한 내 얼굴을 봤을 때 아닐 거라고는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지만 은근 조리원에서 가만히 쉬기만 해도 살이 빠지길 기대했다. 부기를 빼기 위해 따뜻한 물을 하루에 2~3L씩 마시고 비싼 마사지까지 받으니 매일매일 체중계의 숫자가 줄어들긴 했다. 매일 체중이 줄어드는 경험은 처음이라 신기했다. 하지만 2주의 산후조리 후 나의 체중은 절반밖에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집으로 돌아와서 임신 기간 내내 시달렸던 우울증을 격파하기 위해 우울증 약을 먹으면서 시작되었다. 우울증이 나아지고 아기와 남편 그리고 두 고양이와 지내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던 나머지 매 끼 식사가 너무 맛있었던 것이다. 살이 다시 조금씩 찌는 것이 느껴졌지만 우울증에서 회복된 사실이 너무 즐거워 주변 사람들에게 살이 쪄도 행복하다고 말하고 다니기에 이르렀다. 체중계의 숫자를 다시 확인하기 전까지 말이다.
원래는 육아휴직 복직 후 다이어트를 시작하려고 했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나의 경우 칼로리 소모가 크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과 매일 단란하고 즐겁게 식사를 하는 시간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쁜 아기와 함께 사진을 찍었을 때 도저히 저장하고 싶은 사진이 없다는 점, 살찐 나를 위해 새로 산 바지조차 입기 버거운 점, 매일 집에 걸린 어여쁜 웨딩 사진을 볼 때마다 약간 울적해지는 점이 다이어트를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에 이르게 했다.
임신 전에는 굶는 것도 쉬웠고 살도 금방 빠지는 편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점심 한 끼 정도 거르는 건 굉장히 쉬운 일이었고 먹지 않은 만큼 체중은 금방 감소했다. 하지만 출산 후 줄어든 기초대사량은 굶어서 고통받는 나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기계적으로 계산했을 때 하루 500~700 kcal 만 섭취할 경우 살이 안 빠질 수가 없었지만 어느 순간 체중계는 계속하여 나를 배신하였다. 몸과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단단히 믿고 있던 나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래서 굶어서 다이어트하지 말라는 것이구나' 뒤늦게 통탄했다.
굶는 다이어트 첫 10일 정도는 매일 닭가슴살 두 개와 야채만 먹다가 음식에 대한 전례 없던 집착이 생기는 것이 두려워 렌틸콩과 달걀을 추가해서 먹었다. 그럼에도 음식에 대한 원초적인 갈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활동량이 많지 않아도 살아있기 위해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이 필요로 하는 영양분이 있기 마련이다. 굶는 다이어트를 하면서 체중 감량은 더뎠음에도 영양 부족으로 인해 나의 개별 세포들이 굶주리게 되었고 말 그대로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배고픔을 느끼게 되었다. 이 배고픔은 나의 신체와 인격을 지배하고 하루 종일 음식 생각만 하는 광기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물론 이 또한 호르몬의 농간이다.
배고픔과 배부름은 각각 그렐린과 렙틴이라는 호르몬에 의해 영향받는다.
- 그렐린: 식욕을 증가시키고 위산 분비와 위장 운동을 촉하며 뇌에 '배고프다'는 신호 전달한다.
- 렙틴: 식욕을 억제하고 에너지 소비를 증가시키며 뇌에 '배부르다'는 신호 전달한다. 비만인 사람은 렙틴 저항성이 생겨, 렙틴이 많아도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렐린은 공복일 때 만들어진다. 또 그렐린은 뇌를 자극하여 도파민을 방출하게 하는데 도파민으로 인한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 기호성 섭취를 하게 된다. 음식에 중독되는 것도 그렐린 때문인 것 아닐까? 연구에 따르면 과체중인 사람의 혈액에 유독 그렐린 농도가 높다고 한다. 그러니깐 단순히 게으르거나 자기 절제력이 없어서 더 많이 먹는다고 하기엔 실제로 배고픔에 더 노출되는 환경에 있는 셈이다. 요즘 유행하는 화제의 위고비의 경우 그렐린과 렙틴의 생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진 않지만 그렐린은 감소하고 렙틴은 증가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위고비를 맞는 동안은 덜 배고프니 덜 먹는 것이고 이를 끊을 경우 다시 살이 찌는 건 배고픔이 다시 살아나 원래의 식습관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체중 감량에 유일하게 지속적인 효과를 낸다는 치료법인 위 절제술은 위에서 주로 분비되는 그렐린 농도가 개선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이어트를 하면서 겪게 되는 배고픔 외의 또 다른 부작용은 바로 계속해서 나의 몸을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을 자인해왔다. 그 말은 여성의 몸을 시장의 논리에 의해 재단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타인의 몸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았지만 정작 나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일에 실패했다는 사실로 인해 정신적으로도 움츠러들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엔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록산 게이의 말대로 나도 그냥 허점투성이 인간일 뿐인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물론 비만 단계까지 가지 않은 내가 그녀의 말을 인용하는 것에 그녀가 또 화를 낼 수도 있겠다만 그 또한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시행착오를 통해 최대한 어리석지 않은 방향으로 조금씩 삶을 이끄는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나는 굶는 다이어트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던 핫도그 생각에 종일 찌뿌둥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너무 미련하고 우스웠다. 대신 키토제닉이라고도 불리는 저탄고지 식이요법을 진행 중이다. 난생처음으로 시도하는 방법이지만 어쩐지 힘이 솟고 희망이 생긴다. 이것 또한 호르몬 렙틴의 효과일 수 있지만 훨씬 더 생산적인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최대한 맛있게 음식을 음미하면서도 케토시스를 통해 지방이 태워지길(!?), 설령 원하는 만큼 살이 빠지지 않아도 나에게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며 긍정하도록 노력하길 스스로에게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