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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 속도 Apr 26. 2016

섬 - 과거는 과거다

이제야 온전히 헤어집니다, 안녕 제주도

4개월여 만에 급작스럽게 마음의 고향 제주도로 일을 하러 며칠 떠나게 되었다.

현재의 감각을 지닌 채로 그때의 그 공간에서 며칠 지난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산골짜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커튼을 치면 아무런 불빛도 들어오지 않는 기숙사. 더 이상 내 집이 아닌걸 내 몸도 아는 건지 아침 일찍부터 계속 깼다. 그러나 출근해서는 예전 사무실로 자꾸만 들어가려고 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기숙사에 돌아올 때도 예전 집의 비밀번호를 자꾸 누르려고 했다. 둘러보면 더 이상 그때의 이곳이 아니다. 풍경만 같을 뿐 아니다. 너무나 같아 보여서 어딜 둘러봐도 과거의 내가 마구마구 돌아다니는 것만 같지만  그 장소를 메꾸는 사람도 공기도 분위기도 많이 달라져있었다.


영화 <인터스텔라> . 후반부 쿠퍼의 집을 지구가 아닌 다른 공간에 복원해두지 않나.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공간에 복원해 둔 그리운 공간... 그런 느낌이었다.

이번 방문은 나의 과거에 대한 미련을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아직 섬에 남아 비슷한 고민들을 가지고 있는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 이맘때 연차의 직장인이 할 수밖에 없는 나의 고민은 하나도 덜어지지 않고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 이 곳은 그때의 그곳이 아닌 것만큼은 잘 알겠다.


제주생활에서 빠뜨릴 수 없었던 새벽 서핑도 나가보았다. 어쩜 새벽이었는데도 20명의 서퍼가 라인업에 둥둥 떠있었다. 아. 나 같은 쫄보는 이제 새벽에도 서핑 못하겠다. 여기저기 휘휘 둘러보며 보드에 맞지 않도록 신경 쓰는 일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파도를 뚫고 패들을 하다가 물만 많이 먹었다. 여기가 어딘지, 정신없던 와중에 괜히 삶의 의지만 다졌다.

새벽의 중문엔 서퍼들이 너무 많았다


비도 억세게 오고 방에 들어가서 자고 싶은데 언제 또 여기 오겠냔 여행자 마음으로 굳이 비옷 사들고 버스를 기다렸다. 지나가면서 당시 팀원들과 처음으로 했던 외식 집도 보이고 그 집이 꽉 차서 기다리면서 둘러봤던 항구도 보았다. 좋은 기억이지만 시렸다. 돌아갈 수 없다. 이젠 그때가 아니다.


해녀학교 때 만났던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하고 있었다. 한 달에 한번 제주의 농산물을 전해주는 제주열두달 (링크는 여기) "제주의 개발이 문제라지만 농토가 쓸모 있어야 그 땅이 지켜지지 않겠냐. 조금이라도 보템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시절, 오일장에서 제철 (듣도 보도 못한) 작물 해 먹는 재미가 있었는데 (가령 설탕인가 싶은 노란 옥수수라든지... 결국 못 먹어본 멜롱이라든지..) 제주열두달을 통해 만나 볼 수 있으려나. 그럼 육지의 또다른 활력소가 되겠단 생각을 했다.


이제 나는 온전히 생활자가 아닌 여행자가 되었다. 비가 와도 굳이 비옷을 챙겨 들고 오늘 아니면 언제 가겠냐, 길을 나서는. 이제 더 이상 그때의 나는 여기에 남아있지 않는구나, 쓸쓸해하면서도 온 몸으로 비를 맞으며 쭈그려 앉았다가는 이런 풍경을 보니 좋구나, 느낄 수 있는.

고양이가 나와 함께 비를 맞아주었다


다시 돌아온 육지의 좁은 내 방에서는 내 냄새가 났다. 이제 우리 집은 여기다. 미적미적 붙잡고 있던 미련을 떨치고 이제야 제주도와 헤어졌으니 또 다른 어딘가로 갈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어디로 간단 말인가. 사회초년생을 너머 3년 차로 달려가는 길.. 고민이 쌓여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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