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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 속도 Dec 17. 2015

섬 - 당연한 나의 공간

다시 가면 많이 그리울 줄 알았다.

생각보다 빨리 가게 되었다. 해녀학교의 송년회는 제주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반가운 마음으로 부랴부랴 비행기 표를 알아본다. 오리발, 슈트, 후드와 마스크를 챙기고 짐을  한 아름 챙겨서 출근을 해 책상에 앉는다. "너 어디 이사가니?" 네. 제주로 다시 이사 가는 마음입니다. 뭐, 직장인의 여행이 그렇듯 여행을 시작하기 전 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공항으로 향하는 9호선 열차가 꽉 차있다. 이놈의 도시, 너무 치인다.

이주하던 날, 복귀하던 날, 모든 기억이 얽혀있어 심란한 공항을 지나 섬에 도착했다. 도착했는데..... 이렇게까지 당연한 기분이 들 줄은 몰랐다. 나는 짐을 바리바리 이고진 여행자지만 공간은 익숙해서 마음이 들뜨다가 아련해지다가 이내 당연해지더라. 일상과 나들이와 여행이 뒤섞여있던 섬은, 이제 내가 육지로 돌아갔으니 온전히 여행의 공간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꼭 그렇지는 않더라고. 과거의 나는 여전히 여기에 남아  익숙한 거리를 지날 때 영화에서 그러는  것처럼 과거의 내가 움직이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더라. 

뭐 하나 변한 게 없는 바람, 억새, 그리고 흐린 하늘

시외버스는 일찍 끊기고 비는 부슬부슬 오고 마지막 차를 타려면 택시로 가로질러 지름길로 가야 한다. 그래, 나는 이제 집도 차도 없는 여행자이다. 맵으로 버스 시간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게 어디야. 처음 내려올 때만 해도 안됐었는데. 생활자가 아닌 이유로 여행의 피곤함이 더해진다. 집 대신에 게스트하우스를 가고 지인 집에 묵고- 그러면서 왠지 미안한 마음도 갖게 되고- 입장이 갑자기 이렇게 180도로 바뀌나, 새삼스럽다.

버스의 불빛이 멀어지고 나니 게스트하우스로 들어가는 길이 깜깜하다. 마음이 편해진다. 너무 쨍한 건 피곤해.. 그동안 너무 피곤했어.. 막차를 타고 들어오는 바람에 게스트하우스 언니가 일부러 기다리고 있었다. 이 큰 공간에 나와, 또 다른 게스트 한 명밖에 없단다. 캡슐커피를 뽑아마신다. 제주에 살러 오기 전 '다큐 3일'에서 이 게스트하우스를 본 적이 있다며 말을 건네 보았다. 잠깐 나왔는데 사람들이 많이 기억한다며 웃는다. 밝고 맑은 사람이다. 동네 이야기를 해준다. 처음 게스트하우스가 생겼을 때, 마을 분들이 이게 뭔가 궁금해했다고. 뭔데 서양애들이 들락날락거리냐고. 어느덧 6년이 지났고, 이젠 게스트하우스를 찾는 손님들을 차로 데려다 주시기도 한다고 했다. 제주에 살 때, 현지에 융화되는 건 참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여긴 참 잘 녹아들고 있었다. 그동안 이 동네는 변한 것이 없다며 또 웃는다. 그러게. 앞으로도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좋은 마음으로 씻고, 자리에 눕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동네  개소리. 거리의 소리가 지워진 고요한 공간도 너무 오랜만이다.

그리웠다. 비어있는 공간

윤슬이 비치는 아침 바다, 구름 사이의 빛 내림.  목줄 찬 동네 청년 개 두 마리가 지나가다가 차를 보고는 돌담에 쏘옥 쏘옥 숨어버린다. 빼꼼 내다보기는. 한가로워 좋다. 익숙한 풍경들. 나 아직 여기 살고 있나, 착각이 든다. 칼바람이 치고 파도가 얼굴을 때린다. 이내 현실로 돌아오려다 산간의 바람소리, 싱그러운 냄새를 맡고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산록도로를 달려 그리웠던 얼굴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피곤해하고. 공연을 보고 한치 배 불빛을 바라보고. 내 얘기를 가만히 듣더니 사람에 정말 치였나 보다-라고 말을 건넨다. 음. 그런가. 그냥 빈 공간이 그리웠어. 나 하나 난 것 빼고 변한 게 하나도 없잖아 여긴. 

슈톨렌을 샀다. 여긴 집이 아니니 다시 돌아가야지. 육지로 돌아가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친구들이랑 나눠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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