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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 속도 Aug 12. 2016

사표는 어떻게 내는 건가요?

막상 정리하려니 뜨뜻미지근 허무하네요

정리를 하려고 보니 나를 위해 그리고 남아있을 사람들을 위해서도 왜 나가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으. 좀 껄끄러운데. 그래. 이 기회에 말을 해두는 게 남아있을 동료들을 위한 길 아닐까. 글쎄.. 한두 명의 의지만 가지고는 전반적인 문화를 바꿔나가기는 힘들 텐데.

커리어로 자부심을 느낄 수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동료들이 너무 작았다. 짬이 많은 개발자와 기술도 잘 모르고 미숙한 기획자들 구도랄까. 나야 SI 성향이 짙은 B2B 제품만 맡아봐서 그랬겠지만 회사의 다른 제품들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기술을 바탕으로 빠른 시일 내에 결과물이 나올 수 있도록 신제품을 기획하는 게 중요했다. 제품을 만들기 전 사전조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유저 리서치라고 할만한 걸 한 번도 해보질 않았다. 물론 돈/시간문제도 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시도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방향성은 위에서 내려오는 거라 거기 맞추기에 바빴다. 어설프게 정의된 문제이다 보니 중간에 자꾸 바뀌고 로드맵을 멤버들과 비전을 나누기도 힘들었던 것 같다. 가끔은 나조차도 뭘 하고 있는 건지 회의감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럼 얘기하지 그러냐고? 다양한 루트를 통해 어필해 봤다. 그리고 여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큰 조직이었다. 과연 탁월한 제품이 나올 수 있을까, 나는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까 의심이 되었다.

절차적으로 기획자가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어야 될 거 같고, 역할을 존중해 주어야 할 것 같다. 고민이 충분히 된다면 방향성이 쉬이 바뀌지 않아 비전을 멤버들과 모두 나누고, 명확해질 것 같다. 조직이 꽤 크니까 실무자들이 어떤 리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살펴보고 시그널로 삼아야 할 것 같다. 진급, 상벌제도, 연봉까지 원칙이 일관적이게 와 닿았으면 좋겠다. 기준이 명확해야 아 내가 이렇게 노력하면 보상을 받겠구나, 하는 확신을 얻지 않을까. "내가 회사에 기여를 하고 있고, 대접받고 있구나" 하는 구석이 있어야 믿고 따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네가 갈 그곳에서는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을 것 같냐고. 그래. 사실 돈도 없고 체계도 없을 거다. 왜 더 크고 체계 잡힌 회사에 대한 욕심이 없었겠어요. 그렇지만 사업도 론칭 직전이라 집중해서 새로운 디자인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고 전망 좋은 분야고(IoT, 핀테크, O2O), UX 전문가로 성장하고 싶은데 가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사용자 쪽 연구를 많이 해야 될 거 같고, 함께 할 사람들이 UX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사람들 같았다. 조직의 문화를 이제 잡아나가는 과정이라 잘 해보고 싶은 욕심도 느껴졌다. 만약 사업이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나 스스로 많이 성장해 있을 것 같았다. 언제까지 밖에서 쟤네 재밌는 거 하네, 부러워만 할 수는 없었다. 한번 들어가서 보고 싶었다. 이 동네는 어떤지. 아직 젊으니까. 그리고 연봉도 괜찮았...

인수인계 문서를 마무리하고, 담당하고 있던 일을 마무리해서 보고했다. 실제로 일을 정리하는 데는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설명하는데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남은 시간에는 사람들을 만나고 인사를 나누었다. 전 팀 사람들, 지금 팀 사람들, 유관 팀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밥을 같이 먹고 그동안 못 나눴던 이야기도 나눴다. 잘 가는 거다, 수고했다, 잘 할 거다, 멋지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많았다. 고마웠다. 짐을 주섬주섬 꾸리고 자리를 정리하고 먼지를 닦아냈다. 이 짐을 정리하면 3년이 정리된다.


집에다가는 어떻게 얘기하나. 제일 걱정이었다. 나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이렇게나 많이 고민했는데 그냥 결과만 턱 들었을 땐 "쯧쯧, 저 철없는 것" 하진 않을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세계에 자식이 뛰어든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동안의 고민을 글로 정리하고 보여드렸다. 그리고 어떤 회사인지 설명드렸다. 걱정과 달리 응 그래. 얼른 집에 와하신다. 


마지막 출근은 나만 하는 졸업식 같았다. 일부러 조금 늦게 탄 출근 버스부터 PC 포맷 한번에 날아가버린 자료들. 쇼핑백 2개어치의 짐. 동기들의 배웅까지. 마루에 드러누워 뒹굴거리고 싶다.  



Special Thanks to

떠나는 걸 두려워하지는 않도록 제게 힘을 준 글에 오늘도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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