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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 속도 Jul 14. 2021

'일못'이어도 커리어는 이어진다

'일못'은 지금의 상태지 라벨이 아니니까

이 매거진의 지난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온보딩 얘기를 하고 브런치가 뜸했던 것은 이직 후 스스로 업무능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게 벌써 7개월 전인데, 아직도 그 마음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커리어는 이어져야 하고, 실제로 이어지고 있으니 내 마음을 고백해본다. '일못'을 미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회사에서의 일은 무릇 협업이니 누구든 적어도 나의 일을 진척시키는데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일머리가 없어서일 수도 있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정보다 제한되어있고, 책임의 범위가 과도하게 넓고 일의 규모가 이제껏 맡아온 바와 어나더 레벨일 때 등등 -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건 최근의 일이다. 내가 바로 그런 이유로 '일못'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잘하는 점:

복잡한 상황을 자르고, 확인해야 할 부분을 빠르게 확인하고, 다음으로 나아가게 행동하는 것


못하는 점:

이미 진행된 일을 한판 정리해서 추후의 누군가가 봐도 한 번에 알아듣게 정리하고 문서의 공개범위를 적절히 조절하는 것

그런데 지금의 일터는 내가 못하는 부분이 눈에 훨씬 잘 띄는 환경인 것이다. 사람이 시들시들 말라버리는 덴 3번의 평가면 충분하다는 글을 지나가다 본 적이 있다. 아무리 디렉션을 받고, 또 노력한다고 해도 계속 기대 수준에 맞추지 못한다 싶어 지니 네 절로 그렇게 되더라고. 잘하는 걸 굳이 칭찬해주는 상급자는 거의 없으니 피드백이란 죄 못하는 점뿐이었고 (그게 거의 1년이나 가까이 이어졌고) 원격으로 일이 진행되니 동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럼에도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기는 한지 알 길이 없고. 그렇다고 '아니 나는 그건 잘 못해요. 안 할래요.'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커리어는 마라톤인데 이걸 넘어야 다음의 업무가 주어지고 그게 성과가 될 테니까. 약간의 테크닉을 활용해서라도 잘 수행하고 있다는 표시를 내야 되는데... 그것도 멘탈이 건강할 때 얘기지, 양파도 아니고 겨우겨우 싱크를 맞춰놨다 싶으면 또 다른 이슈가 생기고 이거 내가 제대로 커버 치지 못하면 프로젝트 엎어진다는 공포가 지속적으로 주어지니 어쩌지 정말로 그만둬야 되나 싶어 졌다. 이거, 아무래도 건강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아 커리어 처음으로 보스에게 하소연을 했다. 뭘 요구하는 건 아니었고 그야말로 하소연. 말이라도 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니 당장 어떻게 하자는 건 아니고 무라도 무사히 썰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지금 조금만 헛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에요 같은. 덜덜 떨며 말을 꺼냈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사과도 받고, 잘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한 피드백도 받았다. 역시, 원격이 잘못했네요. 칭찬이란 원래도 어려운데 뜬금없이 메신저로 칭찬하기 더 이상하잖아. 그래서 부정적 피드백만 이마만큼 받았던 것. 나는 그게 나 자체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시그널로 받아들였지 뭐야.


대화를 계기로 앞으로 몇 개월 더 힘내서 달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러지 못했지만 못한다고 얘기해도 된다. 그게 번아웃으로 몇 개월, 몇 년 바닥을 치는 것보다 훨씬 낫다. 프로젝트에서 배제되고 동종업계 레퍼런스가 망해서 이직을 못하고 '중심을 잃고 목소리도 잃고 비난받'는 일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성장 중심의 이 업계에서 일꾼은 자주 그런 상상을 하게 되지만 말이다.


그래서 못하는 점은 어쩌기로 했냐고? 그건 내가 안고 가야 되는 숙제. 일단은 아주 잘게 쪼개 보기로 했다. 보고도 짧게. 미팅도 짧게. 어차피 길어지면 맥락이 흩어지니까. 그럴수록 문서 정리하기는 더 어려워지고. 그리고 이미 정리되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문서는 아카이빙하고 필요하면 최신 버전을 따로 만들어보기로. 그러려면 지금의 나보다 몇 배나 부지런해야 하는데, 글, 나는 게으르기도 하고 당장 해결해야 할 이슈들이 매일매일 쌓여있어 잘 해낼지는 모르겠다. 일단 시도나 해보지 뭐.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지금 내가 속한 조직이 기존보다는 규모가 몇 배로 크고 프로젝트도 그만큼 유관부서가 많아서인데, 고민이다. next step은 어떻게 돼야 할지. 잘하는 게 더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찾아가야 할지, 어쨌든 넘어야 할 산이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연마해야 할지. 어느 쪽이든 과하게 마음이 다치는 건 피하려고. 번아웃의 매일매일의 기록은 아래 브런치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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