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이어는 어폐라고 생각했다. 내 여행은 고작 3개월 남짓이었으니까. 하지만 앞 뒤 기간을 합치니 정말로 어엿한 갭이어가 되고 있다. 되려 백수생활 너무 익숙해져서 큰일이야. 느지막이 일어나 빵 궈먹고 커피 내려먹고 씻고 텃밭 정리하고 씻고 누워있기. 책 하나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내려서 공원에 가서 햇볕 쐬기. 글을 쓰고 영상 편집해서 올리기. 뭐 평화로운 일상뿐만은 아니고 아시다시피 여행도 하고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짓을 하며 일 년을 꽉꽉 채웠다. 이번 여행까지 치니까 나도 벌써 27개국을 여행했더라. 이 정도면 세계여행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서는 전시를 많이 다녔다. 주로 국립중앙박물관이었는데
전시관은 다 달랐지만 어쩜 내가 다녀온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이야기라니 알던 얘기도 다르게 보였다. 정말 아는 만큼 보인다고, 더 알고 싶은 역사들이 많아졌다. 요즘 <벌거벗은 세계사>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구직. 구직이라는 게 그래 공고도 인터뷰도 내 마음대로 스케줄링을 할 수 없으니 중간중간 많이도 지쳤다. 생각보다도 길어지는 구직기간에 금전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지치지 않을 사람한테만 선퇴직, 할만하다고 말하고 싶다. 막상 돈이 떨어져 가면 좀 그래. 연이어서 전형에서 떨어지면 그때마다(자의든 타의든) 마음이 깎여나가고. 그럴수록 나를 더 되돌아봤다. 나는 다시 직장인이 되고 싶은 게 맞나? 어떤 형태의 업을 이어나가고 싶은가? 갭이어로 잠깐 멈춰 섰지만 원래 나는 10+연차 서비스기획자/PM/PO. 좀 예전에 개봉한 영환데,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세간의 평가야 어땠든 프로젝트를 잘 끝내놓으면 그게 어떤 방향으로든 이어질 수 있다는. 마치 인수를 여러 개 한 스타트업이 그다음 비전을 잘 찾아내는 경우처럼. 이 생각은 언젠가 조직의 보스와 나눈 얘기와도 연결된다. 프로덕트 오너 하나하나는 프로덕트의 세계관을 짜는 사람들이라고. 일단은 어디까지 기능을 구축하고 나면, 그다음으로 개선과 확장을 거듭하여,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거라고. 내 세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내 업.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 업을 다른 방향으로 확장시킬 시점에 놓인 것 같다. 그래서 이 여행이 나의 커리어, 그리고 인생에서도 세계관 확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업계도 들여다보게 됐고(여행업), 새로 만들어지는 툴(AI)도 이것저것 만져보았다. 경제상황도 급변해서 세계 경제 속에서 업계가 버프(!)를 받아 성장했던 부분(특히 플랫폼. 쿠팡 같은 회사가 근 10년의 저금리가 아니었으면 나올 수 있었을까)을 성찰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직업윤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10년 뒤에, 20년 뒤에도 직장인으로 남아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직업인으로는 남아 있을 테니 이 생각들이 내가 일을 하며 만들어갈 또 다른 '세계'에 도움이 될 것을 안다. 푹 쉰만큼 열심히 일하겠지만 그게 어디를 향하는 건지도 생각하면서 가야지.
팀을 다시 구하는 데는 계속 실패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름의 기준이 있다.
1. 내 경험이 쓰일 수 있거나, 다른 경험치를 쌓을 환경이 마련되어 있고
2. 비즈니스가 시장에서도, 내가 보기에도 매력적이어야 하며
3. 실행할 동료가 매력적인 곳
지금껏 나의 재미는 합이 맞을 때 오는 쾌감, '이게 되네'에서 오는 재미, 그리고 그걸 해나가면서 스스로 확장해 나가는 감각이었다. 그게 내 롤이든, 도메인이든, 혹은 글로벌이든 뭐 하나라도. 여행을 끝마치고도 9개월째, 나는 내 업을 간절하게 찾고 있다.
좀 더 예전 세대에서는 여행작가가, 요즘은 여행유튜버가 되기도 한다던데 그 세계는 내 세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단 공급이 너무 많잖아. 이 기록은 "여행작가"로서의 기록이 아니라 "10년 차 직장인의 갭이어"가 겪은 혼돈과 깨달음을 다루는 기록이었다. 그저 이 여정이 다음 장을 여는 준비기로 되돌아봐지길, 이게 끝이 아니라 시즌1이었기를. 그래도 이 덕에 플라멩코도 배우기 시작했고, 스와힐리어 초급을 수료했으며 아랍어도 관심이 생겼으니 소기의 성과는 있었던 거 아닐까. 시즌2는 글쎄, 스페인 남부, 모로코+서아시아(MENA라고 하더라. Middle East North Africa), 그중에서도 특히 발칸(그리스 터키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스탄 국가들, 그리고 15년째 가고 싶어 하고 있는 남미 중이었으면 좋겠다. 물론 시간 나는 대로 중간중간 다이빙투어를 계속 다닐 거고 산을 탈거고 국내에서도 액티비티를 이어나가겠지만. 종국에는 뭐가 되어있을 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여행과 액티비티에 한 걸음씩 더 가까워지는 삶을 꾸려가고 싶다. 그 열망이 이 여행에서의 진짜 수확이었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읽어주셨다면 우리 유튜브에서도 계속 만나요. 아주 많이 주절거립니다. 영상으로 찌는 브런치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