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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 속도 Jan 30. 2023

길 위의 우리는 만나서 회복하고 꿈꾸느라 또

완등으로의 길 위에 선다

2022년, 영남알프스 9봉 완등메달을 받았다.

아래는 완등으로의 기록.


2022년 6월 25일 오전 8시 10분.

운무가 정상석을 돌아 흩어지고 있었다. 여기가 마지막인가 싶은 봉우리를 지나 암벽 구간을 다시 지나 저 멀리 정상석을 확인하고 안개 낀 능선을 조금 더 걷고 나서였다. 아, 완등 막차를 탔구나. 길었던 여정 사이사이에 함께해 주신 분들 하나하나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2022년 6월, #영축산

딱 일주일 전, 장마 예보가 떴다. 야, 이렇게 산 딱 하나 남겨두고 실패하고 마나. 역시 간월산 신불산 갈 때 같이 갔어야 하는데... 일기예보를 연신 새로고침 했다. 요 몇 년간 마른장마였는데 괜찮지 않을까. 그게 기후위기 탓이니 마음은 무겁지만. 아니나 다를까, 산행 날 비가 안 온다고 예보가 바뀌어 금요일 밤 퇴근하자마자 울산행 SRT를 탔다. 울산의 친구를 만나 내일 새벽에 나가야 되니 일찍 자자고 정리하던 중 친구는 물었다. "나 등산화가 없는데 괜찮을까?" 뭐라고? 급하게 찾아본 영축산은 다행히 임도로 길이 잘 닦여있었다. 중간에 취서산장도 있고. 여차하면 산장에서 쉬고 있으라고 하면 되겠다. 또 한 가지 우려는 더위였다. 이미 한여름이라, 게다가 장마의 중간이라 너무 덥지 않을까. 그것도 초보와 동행이면 너무 힘들어할 거 같은데? 계획보다 조금 더 일찍인 새벽 5시에 집에서 출발했다. 이미 하늘은 핑크빛으로 물들었지만 연일 공급된 습기로 산 자락에 운무가 자욱했다. 게다가 영축산은 수풀이 우거진 잘 닦인 도로를 가지고 있어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기분 좋게 오를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지난달에 갔던 문복산과 고헌산은 땡볕이었거든. 거길 같이 갔다면 이 찬구는 평생 다신 등산하지 않겠다고 했으리라. 무난히 임도를 따라 산장에 도착했고, 산장의 의자를 다 지나서 앞쪽으로 난 길로 올라갔다. 주인장님 말로는 정비가 덜된 길이라지만, 이 길을 지나니 깎아지른 바위 풍경이 펼쳐지더라고. 야, 이 맛에 등산하지. 얼른 정상 갔다가 산장 가서 막걸리랑 라면 먹어야지.


2022년 5월, #문복산 #고헌산

태극종주를 한지도 벌써 해를 넘겨 7개월이 지났다. 이러다 3봉밖에 안 남았는데 완등을 못하겠어. 서둘러 안내산악회를 알아보았다. 새벽 7시, 버스에 올랐다. 잠깐 휴게소에 들렀다 깜빡 잠들고 일어나니 오전 11시. 마을 길에 버스를 세워주셔서 다 같이 내려 마을길을 둘러가다 들머리를 찾았다. 근데 문복산, 길이 왜 이래? 먼지가 너무 폴폴 날리는데? 가뭄이라더니. 1시간여 고생고생 기어올라가는 내내 먼지 구덩이었다. 얼른 인증을 하고 내려왔다. 잠깐 숨을 돌리고 차를 타 고헌산 들머리로 이동. ’ 오 아까보다 길 좋은데?’ 싶기가 무섭게 고난의 길이 펼쳐졌다. 이르게 찾아온 여름에, 그늘 하나 없는 땡볕이라니. '앞만 보고 왔죠? 뒤돌아봐봐'라고 알려주신 산악회 대장님 아니었으면 정상에 못 갈 뻔했다. 뒤돌아보니 아까 올랐던 문복산도 한눈에 보이고 그 아래 자리 잡은 마을도 정겨워 보였다. 정상석을 돌아 내려오는 길 혼자 왔냐던 삼촌뻘 아저씨는 '정신' 때문에 등산한다며 회사에서 해야 할 일, 결정하지 못했던 마음의 짐 같은 게 산행하다 보면 정리가 싹 되더라고 말을 걸어왔다. 저도요! 저도 늘 운동은 멘털 때문에 하는 거고, 근육은 덤이라고 말하고 다니는걸요. 아저씨는 내려오는 내내 계속 말동무가 되어주었고 덕택에 나도 일찍 내려올 수 있었다. 버스가 돌아가기까지는 1시간여 남았다. 너무 더워서 입맛도 없고 해서 빙수를 하나 시켜 시원하게 들이켰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 샤워할 때 무릎을 찬물로 3분은 마사지하라고 대장님이 갈무리해 주셨다. 그래, 무릎은 1회용이니까. 또 산행 가려면 아껴야지.


2021년 11월, #운문산 #가지산 #천황산 #재약산

운이 좋았다. 지난 트레일 러닝을 본 친구가 영남알프스 태극종주라는 걸 계획했다 못 간 적이 있다고 연락을 해왔다. 이제 시간이 나서 마침 가려는데 같이 하겠냐고. 나도, 친구도 잠시 일을 쉬고 있던 기간이라 가장 억새가 예뻤던 날, 그것도 평일에 호사롭게 산행을 떠났다. 영남알프스 여정 중 가장 길고 고생했지만 능선의 풍경을 잊을 수 없는 그 산행을.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막차를 타고 오전 3시 40분에 신복 시외버스정류소에 도착했다. 택시 타고 석골사에서 내려 본격 산행을 시작한 시각 오전 4시 15분. 헤드랜턴을 켜고 열심히 산악회 리본을 따라 운문산을 올랐다. 얼마나 올랐을까, 갑자기 하늘이 탁 트이더니 별이 보였다. 처음부터 이렇게 낭만적이 어서야, 운이 좋은걸? 산을 오르는 동안 해가 뜨고 운무가 졌다. 우리는 암좌에 들러 믹스커피를 얻어마시고 챙겨간 빵을 먹고 재정비 후 운문산 정상을 찍었다. 갈 길이 멀었다. 운문산에서 가지산으로 가는 능선. 운해가 걷히는 풍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주위는 환해졌고 우리는 이내 아랫재를 지나고 있었다. 또다시 골을 향해 오르는 여정. 가지 산장에 들러 대추차를 마셨다. 추웠는지 뜨끈한 게 쭉쭉 들어갔다. 반짝 힘을 내어 조금 오르면 보이는 정상석의 설명을 읽어보니 가지산이 영남알프스의 최고봉이란다. 최고봉을 찍었으니까 앞으로의 여정은 이제 평탄하겠지?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발이 무거워졌다. 도무지 봉이 가까워지질 않는다. 이 봉인가 싶으면 다음 봉이고, 사실은 그다음 봉이고. 봉우리에 발이라도 달린 건지. 겨우겨우 능동산 정산석을 지났을 때 시간은 벌써 오후 1시 8분. 오늘 계획한 산행은 아직 두봉이나 더 남았는데. 잠깐 고민하다 계획했던 오늘의 여정을 마무리하기로 하고 힘을 내 약수터에 도착했다. 손을 씻고 목을 축이니 조금 더 버틸 힘이 생겼다. 조금 더 가니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임도가 펼쳐졌다. 오늘의 종주에서 가장 편한 일이 지금부터 재약산 직전까지 이어졌다. 기꺼이 천황산 정상을 제치고 풍경을 돌아보는데 탄성이 절로 나왔다. 단풍 존, 억새 존, 암벽 존. 종합 선물세트이구나. 신나게 재약산 정상 가까이까지 갔을 때 왜 갑자기 암벽 구간이 펼쳐지더니 이어지는 내리막에서 지옥의 계단길이 이어지고 무릎이 아파왔다. 아무런 대화도 없이 숨 가쁘게 내려오니 다행히도 또다시 천국의 풍경이 펼쳐지는데 아, 이곳이 사자평이구나. 억새밭이 유명하다더니. 해넘이가 또 기가 막혀. 황금들판이다 황금들판. 가만, 이러면 안 되는데? 앞에 보이는 고개를 넘어 죽전마을까지 2.3km가 남았다는데? 시간은 5시를 넘겨 무심히 도 산의 해는 급격하게 져버리고 바람 불면 휘잉 하고 낙엽이 굴러다니고 렌턴 비추는 대로 나무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어쩌면 산악회 리본은 듬성듬성 보이는 사람 하나 없는 갈지자의 좁은 뒷산길. 급경사, 게다가 로프까지 등장. 야, 여기서 정신 좀만 놓으면 죽겠다 싶었다. 이 길이 맞나 싶고 넘어지고 구르고 친구는 저를 두고 먼저 가라 그러질 않나 발이 계속 부딪혀서 엄지는 아파오고. 안돼. 마을까지 어떻게든 가보자. 겨우겨우 도착한 마을 앞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시골에서는 늦은 시간이라 이미 식당들은 다 불이 꺼져있었는데, 마땅히 마트도 보이지 않고. 뭐라도 먹어야 될 텐데. 풀 죽은 우리를 다행히도 숙소 옆의 식당 주인장님이 발견하시고 불을 다시 켜고 음식을 내어주었다. 야, 태극종주는 원래 내일까지, 나머지 3봉을 더 올라야 하지만 여기서 그만두자. 그냥 오늘은 오늘의 축배를 들자.

꿀잠을 자고 아침에 숙소에서 일어나 내려온 길을 다시 올려다보니 마지막에 저걸 내려왔다는 거지 싶더라. 사방이 깜깜한데 개소리와 차 소리만 아득히 들려오던 한 시간 반의 사투를 나는 못 잊어. 혹시 종주를 또 계획하게 된다면 하산 계획은 무조건 크고 정비된 길로. 그리고 러닝 양말 말고 등산양말 신는 걸로. 그러지 않으면 두 엄지에 멍이 들 테니.


2021년 10월. #간월산 #신불산

영남알프스를 목표로 하는 트레일 러닝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8주간 서울 시내 여기저기의 산에서 훈련을 마치고 드디어 당일. 오후 11시 사당에서 집결하여 전세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오늘의 코스는 간월산 찍고 돌아내려와서 임도를 따라 계곡까지 내려온 후 다시 신불산 정상을 찍고 돌아오는 2 Peak 코스. 5 Peak 코스를 달리는 참가자들은 열심히 뛰어야겠지만, 나는 설렁설렁 풍경을 즐길 마음이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 새벽 3시, 휴게소에서 간단한 식사를 했다. 전날 카페에서 산 잠봉 뵈르를 먹었는데 새벽에 짭조름하니 급하게 열량 채우기 좋았다. 이제 오후까지 뭘 못 먹으니까 포도당 사탕 잘 챙기고. 복합웰컴센터에 도착한 우리는 달빛을 받으며 다 같이 빙 둘러 몸을 풀었다. 단체 사진을 찍고 조별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첫새벽 등반이었다. 조금은 졸아있었는데 다행히도 등반하자 1시간이 채 안되어 산 너머로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침 해를 마주하며 오르는 황금빛 간월산 풍경이 호사로웠다. 간월재였다. 반대로 조금 더 올라 간월산 정상석을  찍고 계곡길을 따라 임도로 내려갔다. 길 따라 만난 폭포에 잠깐 앉아 등산화를 푸르고 쉬다가  신불산 휴양림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프로그램 측에서 마련해 준 사과, 핫바, 음료수, 바나나. 얼마나 꿀맛이든지. 다시 힘내서 잘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분 탓이었다. 지금까지 내리막을 제외하고는 걸어왔는데도 다시 오르는 신불산 초입의 경사가 어마어마했다. 이정표도 한번 놓쳐서 어리둥절했다. 다시 정신 차려 영축산 쪽을 향하다가 신불산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즈음. 돌아본 신불산 자락 풍경이 어마어마했다. 억새에 구름 그림자가 드리워져 시시각각 표정을 달리하고 있었다. 아… 나는 결국 나머지 7봉도 다 오르게 되겠구나 생각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2021년, 이직을 하게 되었다. 쉬는 동안 해외여행은 못했지만 대신 한국의 아름다운 곳을 많이 찾게 되었다. 영남알프스도 그중 하나. 태극종주를 같이 했던 친구는 이제 새로운 직장을 따라 제주로 내려갔고, 내가 제주에 있었을 때 놀러 와서 한라산을 같이 갔던 친구는 이제 울산에 적을 두게 되어 영남알프스의 마지막을 함께 하게 되었다. 이 여정의 포문을 열어준 트레일 러닝 프로그램 대표님은 크로스핏 박스를 열었고 나는 그곳에서 9개월째 운동을 하고 있다. 산은 사람을 만나는 좋은 구실이고, 그렇게 만난 동지와는 길에서 회복하고 꿈을 꾸고 이다음을 기약하게 된다. 태극종주 때 친구와 그런 얘길 했었다. '밖에서 보면 참 별거 아닌데 조직 내에 있을 때 그게 세상의 전부인 줄 안다. 산에 오면 새삼 그게 별 건가 싶다.'라고. 영축산에서도 또 다른 친구와 같은 얘길 했다. 확실히 산이 주는 회복의 힘이 있다고. 나에게 산은 명상 대신이라고 자주 생각하곤 했는데. 친구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여행이 끝나고 비행기를 타고 돌아올 때처럼 꿈꾼 기분이라고. 나도. 늘 산행이 끝난 후엔 정말 다녀왔나, 전생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해. 어쩌면 산행은 정말 꿈 그 자체 아닐까. 그래서일까. 또 다음 꿈을 꾸고 싶다. 그러니까 지리산 종주 가고 싶단 소리다. 설악산 종주도 조지아 트래킹도 히말라야 MBC 트레킹도. 아무래도 이게 더 길고 먼 트레킹의 시작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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