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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뜻 Jan 12. 2021

무빙워크 위의 당신

멈춤도 걸음의 일부임을




  와, 진짜 힘들다.


  어깨에는 쇼퍼백, 한 손에는 쇼핑백,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본가로 향하는 길. 자취방에서 한 시간 거리인 공항까지 가는 것만 해도 이미 기력을 다 한 상태였다. 무거운 짐들을 이고 지고 지하철역의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린 결과, 김포공항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온몸의 근육들이 저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개찰구를 빠져나오면 남은 길이 조금 수월하다는 것이었다. 국내선 방향으로 가는 길에는 양방향으로 긴 무빙워크가 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알아서 앞으로 움직이는 바로 그 무빙워크가.


  마침내 무빙워크 위로 발을 올려놓은 나는 숨을 훅 내쉬었다. 기나긴 계단과 끝없는 환승통로와의 싸움을 견뎌낸 자에게 주어지는 잠깐의 휴식시간이었다. 짐을 모아 앞에 놓고 오른쪽으로 비켜섰다. 혹시 걷는 사람들이 있으면 지나갈 공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이정도의 속도라면 수화물을 맡기고 수속 시간에 딱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분명히 그 위에 가만히 멈춰 서있으려고 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무빙워크 위에서 또 걷고 있었다. 내 주위에 멈춰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캐리어를 덜덜 끌면서 걷고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 멈춰 서서 숨을 고르던 나도, 사람들이 바삐 나를 제치는 모습과 그들의 멀어지는 등을 보면서 어느샌가 몸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괜히 서있으면 민폐인가 싶은, 왠지 그들의 걸음 속도에 맞춰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점점 빨리하던 속도를 다시금 살살 늦추게 된 것은 어느 두 사람의 등을 마주보았을 때였다. 이제 막 어린이집을 다닐 것 같은 나이의 어린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가 손을 잡은 채 앞에 서있었다. 움직이는 길 위에서 걷는 느낌이 재밌었던 것일까. 아이는 계속해서 걸음을 떼려했고 어머니는 아이의 손을 꼭 붙든 채 망부석처럼 서계셨다. 두 모자가 오른쪽에 붙어서 있긴 했으나 큰 캐리어를 든 채 그 옆을 지나갈 수 없었던 나는 뒤에서 그 실랑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자신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는 또다시 손을 잡아끌었다. 어머니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셨다.


  "안돼. 빨리 가려다 다쳐. 여기서는 가만히 서있어도 돼."


  라고.


  작은 이어폰 음량 사이로 들어오는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나는 그때까지도 '어떻게 제쳐볼까' 고민하던 마음을 고이 접었다. 그리고 캐리어를 붙들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아이는 잠잠해졌고, 내 걸음도 잠잠해졌다. 우리들의 옆으로는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지나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두 모자와 나는 무빙워크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그 위에 서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도착했다. 다치지 않고 무사히. 그리고 늦지 않게.


  왜 나는 멈추었던 걸음을 애써 재촉하려 했을까? 두 명 정도의 사람이 나란히 서있을 수 있는 그 좁은 무빙워크에서 굳이 사람들을 지나쳐가며 말이다. 사람들이 빠르게 걷는 모습을 보니 왠지 나도 그렇게 걸어야 할 것 같아서? 그 '왠지 걸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만 멈춰있다는 생각, 혹은 이대로 가다간 늦을 거라는 생각에 조급해져서. 이 두 가지가 위 물음에 해당하는 답일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이미 넘치게 무거운 짐을 들고 있었다. 두 손이 자유롭지도 않았고, 많은 계단과 길을 오가며 체력이 평소보다 떨어진 상태였다. 나는 그래서 움직이지 않아도 앞을 향해 갈 수 있는 무빙워크가 반가웠고, 그곳에서 가만히 서있을 요량이었을 테다. 그러나 실패했다. 내 마음의 조급함 때문에. 나는 그 위에서도 속도를 내며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기 바빴다. 아마 두 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끝까지 걸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속으로 힘들어, 힘들어 죽겠어! 이렇게 외치면서도.


  그러나 무빙워크는 본래 더 빠르게 가기 위해서 만들어진 길이 아니다. 긴 환승 통로 구간에서 덜 지치고 편하게 가기 위해 만들어진 길이다. 때문에 무빙워크를 탈 때는 걷거나 뛰어선 안 된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리고 내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걷는다. 때때로는 뛴다. 스스로도 숨이 차지만 멈출 길이 없다. 사람들이 모두 걷고 있으면 나 혼자 멈춰서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가만히 서있으면 늦게 도착하고 말 테니까.


  가끔 우리는 이와 같은, 무빙워크 위의 인생을 산다. 충분히 앞으로 향해가고 있음에도 경쟁전과 속도전에 매몰되어 더 빨리 달리고 싶어 하는 그런 인생을 산다. 나 또한 그중 한 명이고, 내 앞에 또는 내 뒤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무수히 많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과 나 스스로를 탓하고 싶지 않다. 그러한 마음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다만, 가끔은 말을 건네고 싶은 것이다. 빨리 가려다 다치니 조심하라고. 여기서는 가만히 서있어도 괜찮다고.


  나는, 무빙워크 위를 걷는 당신이 마음 편히 서있기를 바란다. 무거운 짐을 이고 오는 동안 힘들었을 테니 조금은 쉬어주어도 괜찮다 말해주고 싶다. 무빙워크가 끝나는 곳에 다다랐을 때 걸음을 떼도 충분하다. 멈춰있는 순간마저도 앞을 향해 움직이고 있고, 그것 또한 당신의 소중한 걸음의 일부이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목적지에 다다를 것이다. 다치지 않고 무사히. 그리고 늦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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