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해뜻 Jan 06. 2021

숫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우리의 가치




  [ 언니 저 불합격이래요 ㅠㅠ ] PM 03:33


  2년 간 가르쳤던 고3 아이의 카톡을 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답장을 선뜻 보낼 수가 없어 몇 번을 지웠다 쓰길 반복했다. 과외을 몇 년 했든, 몇 명을 가르쳤든, 좋지 못한 결과를 마주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 아직 정시 남았으니까 괜찮아! 정시 원서 전략적으로 잘 써보자. 언니도 여기저기 알아볼게 ] PM 03:36


  결국은 뻔한 답만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쓰린 마음을 내리누르며 힘내자는 이모티콘을 덧붙여 보냈다. 넵. 하고 아이의 답변이 되돌아왔다.


  대입은 쉽지 않고, 대입을 겪는 아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다. 나 또한 고3 시절, 그 어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대상 중 하나였다.


* * *


  수시 원서 접수를 앞두었을 때 즈음, 지독한 슬럼프가 왔다. 늘 해왔던 대로 아침 7시 20분에 등교해 책상 앞에 앉아있기는 했지만 정신은 다른 곳에 가있었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대입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부쩍 말이 없고 표정이 안 좋아진 나를 눈치챘는지 어느날은 담임선생님이 쉬는시간에 슬쩍 나를 불러냈다.


  "무슨 일 있어?"


  나는 고개를 저으며 없다고 답했다. 그는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알았다며 나를 다시 자리로 돌려보냈다. 자리로 돌아와서 문제를 푸는 시늉을 하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책상에 엎드렸다. 그날 스터디플래너에 쓴 공부 계획은 하나도 해내지 못했다.


  선생님이 다시 나를 불러낸 것은 다음날 청소시간이었다. 그는 나를 학교 매점으로 데려가더니 마시고 싶은 거 하나를 고르라 했다. 나는 그냥 아무 탄산음료를 골랐고, 선생님도 자신 몫의 음료 하나를 골라 계산을 마쳤다. 청소 시간이라 한산한 매점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잠시간 조용히 있었다. 그거 요새 애들이 많이 마시더라, 인기 많나 봐. 침묵을 깨기 위해서인지 선생님은 내 음료수를 가리키면서 말했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진짜 무슨 일 없어?"


  나는 머뭇거리다 전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없다고. 선생님은 같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말하고 싶은데 못 말하는 거면 지금 말하고, 말하기 싫은 거면 안 말해도 돼. 선생님도 이제 더 안 물어볼게.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마지막 물음을 듣는 순간 눈가가 확 뜨거워졌다. 말없이 뚝뚝 우는 나를 보면서 선생님은 한참을 기다려주셨다. 나는 조금 진정되었을 때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은요….


  초등학교를 졸업을 앞뒀을 때 나는 부모님을 설득했다. 서울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교육 환경이 열악한 섬에서는 공부를 잘할 수도 없고, 나중에 따라갈 자신도 없다 말했다. 그렇게 우겨 난 서울에 상경했다. 이곳에서 내가 잘 살고 있다는 걸 증명할 방법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야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를 했고, 애써 노력해왔는데.


  그 최종 목적지라 할 수 있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나니 그동안의 시간이 물거품이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주변의 기대를 저버릴까 무섭고, 나에게 실망할 것이 걱정되어서. 나는 울먹거리며 선생님께 내 불안과 걱정을 털어놓았다. 그동안 목표로 했던 대학이 있었는데 떨어지는 게 무서워서 못 쓰겠다고. 묵묵히 듣고 있던 선생님은 내 말이 끝나자 천천히 말을 꺼냈다.


  "선생님은 네가 거길 썼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기에 너는, 성적표에 적힌 숫자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애가 아니야."


  넌 그 숫자들보다 더 가치 있고 대단한 아이야. 선생님은 그걸 알아. 그걸 그 대학에서도 알아봐 줬으면 좋겠고, 혹시 그 대학떨어진다고 해도 네가 열심히 살아온 걸 한 번이라도 보여줬으면 좋겠어. 선생님 생각은 그런데 네 생각이 더 중요한 거 알지? 쓰고 싶으면 쓰고, 쓰기 싫으면 안 써도 돼. 근데 쓰고 싶으면, 선생님도 많이 도와줄게.


  그날 선생님이 건넨 다정한 위로 덕분에, 나는 결국 원하던 대학에 원서를 쓸 수 있었다. 주변에서 말리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말이 맞았다. 성적표의 숫자는 나를 결정하지 않는다. 나의 가치는 내가,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이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니 떨어지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평가하는 건 나의 일부분이지, 내 전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 대학은 결국 떨어졌다. 그러나 선생님과 나는 불합격 화면을 확인하고서 같이 웃었다. 멋진 도전이었다면서.


* * *


  붙거나 떨어지는, 합격하거나 불합격하는 모든 일들은 결국 아주 단편적인 일이다. 숫자는 과정의 편의를 위해 주어진 지표일 뿐, 그것이 아이들의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 나는 2년간 가르쳐온 나의 과외학생이 얼마나 기특한 아이인지, 얼마나 노력하는 아이인지, 또 얼마나 능력 있는 아이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 아이의 장점에 대해 설명하자면 에이포 용지 한 장을 꽉꽉 채울 수 있을 만큼. 그러나 그것 또한, 그 아이의 가치를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랄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더 용기를 내주었으면 좋겠다. 조금만 더 기운을 내고, 조금만 덜 슬퍼했으면 좋겠다. 세상의 모든 수험생들이, 또는 취업준비생들이, 또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모든 사람들이, 결과의 실패에 대해 너무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가치는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숫자로도, 글로도, 사진으로도. 우리의 전부는 우리 스스로만이 알고 있다. 그것을 믿고 나아가면 된다. 언젠가는 나와 같이 내 전부를, 내 가치를 알아주는 이가 나타나리라는 생각으로.

이전 02화 소외되어도 곧 특별해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