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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뜻 Feb 09. 2021

무릎에 주먹만 한 멍이 든 날

보이지 않는 서로의 멍을 위로하며




    "엄마, 엄마! 이거 봐라!"


    짠!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바짓단을 무릎까지 휙 걷어올리자, 엄마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히익, 이게 뭐야!


    "멍들었어. 얼마 전에 넘어졌거든."


    어디서? 편의점 앞에서. 왜 넘어졌는데? 그냥 다리에 힘 풀려서.


    한없이 가벼운 내 대답에도 엄마의 표정은 심각하기 그지없다. 조심히 좀 다니지 얼마나 크게 넘어졌으면 무릎이 그 모양이냐며, 엄마는 꼭 자기가 넘어진 사람처럼 아픈 표정을 지었다. 나는 멍이 든 곳을 팍팍 손바닥으로 치며 씩씩하게 대꾸했다. 이거 보기에만 화려하지 지금 하나도 안 아파! 그러면 엄마는 질린 표정을 짓는다. 나는 킬킬 웃으며 안방에 있는 아빠에게로 호다닥 달려갔다. 아빠! 이거! TV를 보던 아빠는 쓱 내 무릎을 보더니,


    "어이고, 잘했다."


    무뚝뚝하게 한마디 던졌다. 마치 내가 덜렁거리는 게 하루 이틀 일이냐는 듯. 그래도 무릎을 빤히 바라보는 게 걱정은 되는 모양이었다. 그럼 또 얼마 전에 편의점 앞에서 어쩌고, 갑자기 다리가 저쩌고.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귀가 밝은 아빠는 좀 전에 거실에서 떤 소란을 들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나의 재방송을 심심하게나마 들어주었다.


    남한테 호들갑을 안 떨고는 못 배길 만큼, 이번 멍은 유별났다. 왼쪽 무릎에 내 주먹보다도 큰 멍이 노랗고 시퍼렇게 들어버린 것이다. 평소에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이라 팔다리에 언제 생긴지도 모를 멍이 많은 타입이긴 했다. 워낙에 여기저기 잘 부딪히고 다니니까.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편의점 문 앞에서 무릎에 온 체중을 실어 넘어진 순간, 이건 진짜 크게 멍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진짜, 진짜 아팠기 때문이다. 어지간하면 창피해서 금방 몸을 일으켰을 내가 몇 초 간 무릎을 부여잡고 일어서지 못했을 만큼.


    아니나 다를까. 조금 긁힌 수준이었던 첫날과 달리 그 다음날부터는 팅팅 부은 무릎 위로 거대한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날마다 크기가 커지고 색이 변하는 걸 보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사나흘 간은 그에 동반된 고통을 참아야 했다. 한 번은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무릎을 밟고 넘어가는 바람에 눈물이 찔끔 나기도 했다. 그래도 꿋꿋하게 견딘 끝에, 휘황찬란한 색만 남고 아픔은 가셨다.


    넘어진 날로부터 일주일쯤 지난 지금은 멍이 조금씩 빠지고 있다. 물론 무릎 주위로 노랗고 푸른 끼가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눈여겨보지 않으면 크게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이다. 나는 어쩐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한다. 무릎을 보여줬을 때 상대방이 놀라는 모습을 보는 게 요 며칠 간의 재미였는데, 그게 사라진 것이 조금 아쉬웠다.


    '상처 보여주면서 즐거움을 느끼다니, 이상한 사람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변명을 하자면, 사실 나는 상처를 보여주는 것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기보다 주변 사람들의 걱정 어린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어쩌다가 그렇게 다쳤냐고, 아프지는 않았냐고, 약은 발랐냐고 물어봐주는 것들이, 너무나 다정하지 않은가.


    나는 때때로 사람을 이루는 것들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한다. 종이 한 장, 머리카락 한 올에도 손이 베이고, 테이블에 살짝 부딪혔다고 무릎에 멍이 들고, 조금 작은 신발을 신었다고, 또 조금 헐거운 신발을 신었다고 뒤꿈치가 까지곤 한다. 연약한 우리는 너무나 쉽게 다친다. 그래도 그렇게 다치는 게 조금 낫다. 다친 상처를 보여주면서 종이나 머리카락, 테이블이나 신발 탓을 해도 괜찮으니 말이다. '나 여기 다쳤어'라고 어리광 부려도, 그토록 흔해 빠진 '괜찮냐'는 물음에 감동해도, 그래도 괜찮으니.


    나는 또 생각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들은 그럼 어떻게 하나. 사실 내 손가락 피부보다 더 연약한 것이 있는데, 그 위에 무릎의 멍보다 오래가는 상처가, 까진 뒤꿈치보다 더 아픈 상처가 나있는데, 그건 어떻게 위로받을 수 있을까. 나조차도 함부로 들여볼 수 없을 만큼 아주 깊숙한 곳에 있는, 이 마음의 상처는 어쩌면 좋을까.


    우리는 편의점 앞에서 우스꽝스럽게 넘어졌다는 이야기는 잘만 한다. 그러나 어딘가에, 혹은 누군가에게 부딪혀 마음이 다쳤다는 이야기는 잘하지 못한다. 내 무릎의 멍이 얼마나 크고 화려한지는 잘만 보여주면서, 내 마음의 멍 얼마나 크고 화려한지는 보여주지 못한다. 작은 상처들에는 아무렇지 않게 위로를 구하면서, 정작 큰 상처에 대해서는 입도 떼지 못한다. 그냥 왠지, 그렇게 숨겨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바짓단을 걷어올리면 보이는 무릎처럼, 마음도 한 겹 걷어올리면 눈에 보이는 것이었음 좋겠다고. 내가 원할 때, 이따금씩 여기에 상처가 있다고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눈에 보이는 상처를 사람들은 함부로 다시 공격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또 때로는 얼마나 아팠겠냐고 누군가 다정하게 물어봐주고.


    그렇게 되면 내 눈에도 잘 보일 것이다. 우리는 대개 상처가 눈에 들어와야 그 상처의 존재를 알게 되고, 또 그 원인을 파악하려 든다. 또 상처가 있는 곳이 덧나지 않게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고, 잘 낫고 있는지 가끔씩 확인해볼 수 있다. 그렇게 마음이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있다면, 속에서 곪아 들어가는 상처도 왠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마음은 너무나 연약하고 소중해서, 그렇게 함부로 드러낼 수 없음을 안다. 심장을 비롯한 수많은 장기들이 뼈 안에 꽁꽁 숨겨진 것처럼, 마음은 형체 없이 우리 안에 있음으로써 그 스스로를 지키고 있다. 열심히 다친 상처를 치료하면서 이겨내고 있다. 거대했던 내 멍이 저절로 빠졌듯이. 마음은 나를 위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쩌면 최선을 다해 상처를 이겨내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근데 그래도, 그래도 나아지지 않는 상처가 있다면. 보이지는 않지만 당신을 아프게 하는 상처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혼자서는 견딜 수 없다면.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보이지 않아도, 당신을 아프게 하는 상처가 있음을 나에게만큼은 털어놔주었으면 좋겠다. 그럼 나는 언젠가 당신이 원했던, 또 내가 원했던 물음들을 던져줄 것이다. 어쩌다 그렇게 다쳤는지, 아프진 않았는지, 약은 잘 바르고 있는지, 지금은 괜찮은지. 당신 마음의 상처가, 잘 아물고 있는지.


    억지로 말을 꺼내지 않아도 좋다. 당신이 말을 하기 어렵다면, 내가 조금 더 유심히 당신을 바라보면 된다. 어렵게 말을 꺼내지 않아도 눈치챌 수 있게 당신을 아껴주면 된다.


    나는, 그렇게 당신이 알아채 주길 바라는 상처를 알아채 주는 사람이고 싶다. 너른 품으로 안아주고 약을 발라주는 사람이고 싶다. 더 바라자면, 그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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