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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뜻 Apr 03. 2021

나만의 다락방

따뜻한 빛이 새어나오는


    다락방이 생겼다. 물론 살던 집에 뿅, 하고 생긴 것은 아니다. 서울살이 10년만에 이사를 했고, 내 방이 생겼고, 그 방 안에 작은 다락방이 있었다. 방에서 창문을 열면 바깥이 아니라 다락방이 나타나는 구조다. 오빠와 동생이 함께 쓰기로 한 안방을 제외하고 나는 두 가지 방 중에서 내 방을 고를 수 있었는데, 숨겨진 공간의 존재를 알고선 큰 고민 없이 이 방을 택했다. 다락방. 왠지 이름만 들어도 낭만적이지 않은가.    

           

    그 안을 아기자기하게 꾸미겠다는 결심이 무색하게, 이사 직후 다락방은 창고로 전락했다. 방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짐들을 모조리 쑤셔넣었기 때문이다. 가구가 전부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처사였다. 잠을 자야하는 방에 온갖 짐들을 쌓아두고 살 수는 없으니까. 나는 다락방 안에 아무렇게나 짐을 던져놓은 뒤, 그 어수선함이 보이지 않게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며칠은 열어보지 않았다.               


    하루는 가만히 집에서 쉬고 있는데, 다락방을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수선했던 집 안 곳곳이 점차 깨끗해지고 있는 와중에 내 다락방만이 어질러져있는 것이 거슬렸다. 버릴 건 버리고, 보관할 건 한 곳에 모아 가지런히 정리해두자. 나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호기롭게 창문을 열었다. 이리저리 정신 사납게 널러진 짐들을 보니 다시 문을 닫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꾹 참고 다락방에 올라섰다. 지금 해야 마음이 편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잡동사니 상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별별 물건들이 다 들어있었다. 고장나서 안 쓰는 충전기들 하며,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악세사리, 과외할 때 다 쓰고 버리지 않았던 볼펜들, 필기 종이들, 예전 단편영화 촬영 때 썼던 소품들 등등이 나왔다. 나는 하나씩 물건들을 꺼내 정리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개중에는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도 더러 있었지만, 필요없는 것들이 훨씬 더 많았다. 이건 대체 왜 산 거지? 싶은 물건들도 있었다. 그런 물건들을 발견할 때면 과거의 나를 한대 쥐어박고 싶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는 옷을 정리했다. 이미 방 한 벽면을 차지한 옷장에 들어가지 못한 옷들이었다. 계절옷은 따로 박스에 담아두고, 남은 옷 중 입을 옷과 입지 않을 옷을 나눴다. 입지 않을 옷들은 주위에 나눠줘도 될만큼 깨끗한 옷과 그렇지 못한 옷으로 나눴다. 가끔은 사고 보니 색이 어울리지 않아서 혹은 사이즈가 안 맞아서 안 입고 다니는 옷들이 생긴다. 환불이나 교환을 귀찮아 하는 성격 탓에 이런 옷들은 모아두었다가 친구들에게 나눠주곤 한다. 비록 내겐 어울리진 않지만, 또 제 주인을 찾아가면 잘 어울리는 옷이 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는 책더미를 공략했다. 두 번은 안 읽을 것 같은 책들은 중고서점에 팔기 위해서 빼두고, 시집은 시집끼리, 소설은 소설끼리, 동화책은 동화책끼리 따로 쌓아두었다. 책장이 들어오지 않아 여전히 어수선한 느낌은 있지만 아무렇게나 쌓아올려져있던 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짐들을 정리하고 한결 깨끗해진 다락방에 앉아서, 나는 열심히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좀 정리가 되니 다시 다락방에 대한 낭만이 솟아오른 것이다. 나는 열심히 다락방을 꾸밀 궁리를 하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주문했다.               


     며칠 안 되어 모든 물품이 도착했다. 바닥에 깔 카펫, 밝은 조명, 책장, 좌식 소파와 테이블. 나는 모든 물건이 도착한 걸 확인하고서 본격적으로 다락방 인테리어 작업에 착수했다.               


   직접 타일 카펫을 하나하나 깐 뒤, 책장을 안으로 옮겨 쌓아두었던 책들을 하나씩 꽂아두었다. 남는 칸에는 추억이 담긴 사진들이나 물건들을 진열해놓으니 그럴싸했다. 작업을 할 때 필요한 좌식 소파와 테이블을 가운데에 놓고, 집 안에서 갈 곳을 잃었던 전신 거울 또한 한쪽에 세워두었다. 따뜻한 빛의 조명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니 전과 다른 분위기가 생겼다. 꿈에 그리던 다락방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좋아하는 책, 추억의 물건들, 따뜻한 불빛이 있는, 나만의 다락방이.               


    나는 내 방에 딸린 작은 다락방을 치우고, 그 안을 채워나가는동안 문득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 이곳은 내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또 무엇을 들이냐에 따라 창고일 수도 있고 소중한 작업공간이 될수도 있으며 추억의 전시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쳐다도 보기 싫은 공간이었다가도 내내 눌러앉고 싶은 아늑한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마음에도 다락방 같은 공간이 있다면, 나는 그곳을 어떻게 쓰고있을지 상상해본다. 혹시 보기 싫다는 이유로 아픈 기억들, 힘든 기억들을 그 안에 던져두고 짐처럼 쌓아두고만 있는 건 아닐까. 꽁꽁 문을 닫고 다시는 열지 않겠노라 고개를 돌려버린 건 아닐까. 그 속에 실수로 들어간 추억들과 소중한 기억들은, 그렇게 먼지 속에 버려져있는 건 아닐까. 혹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그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청소를 해야지. 묵은 짐들을 다 빼고 좋아하는 기억, 필요한 순간들을 그 안에 채워나가면서 나만의 낭만이 깃든 곳으로 만들어야지. 하루가 지치는 날에는 언제나 그 문을 열어, 그 안락함에 파묻혀지낼 수 있게. 그 다정함에 숨어지낼 수 있게.        

       

    또 가능하다면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그런 공간으로 남길 바란다. 매일같이 오가는 방과 부엌, 욕실이나 거실이 아니더라도 가끔씩 혼자 있고플 때 떠오르는 그런 공간. 숨겨져있지만 그래도 그 안에 항상 열려있는 공간. 따뜻한 빛이 새어나오는 공간. 조용하지만 외롭지 않은 공간. 잠깐의 머무름조차 반겨주는 공간. 아늑하고 다정한 공간. 바래지 않은 낭만들이, 추억들이, 사랑들이 잠들어있는 다락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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