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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Sep 12. 2018

서른의 사춘기 I

독일 생활 5년차, 내가 계획했던 일들을 이루었다.

전형적인 한국식 교육을 받은 나는 공부가 성공의 길이라는 어른들의 말을 철썩 같이 믿던 아주 고지식한 학생이었다. 모든 과목을 잘하고 싶어해 재능이 없었던 미술 수행평가 숙제라도 하는 날은 새벽 5시까지 몇 번이고 별반 나을 바 없는 그림을 다시 그리기를 미친듯이 반복하는 것이 내 중고등 학창 시절의 모습이었다. 그런 노력이 가상해서 인지는 몰라도 내 성적표는 수로 가득했고 나는 그 성적표가 나의 아이덴티티(Identity)라는 아주 큰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그런 공부가 가져다 줄 인생의 성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비록 수능 수학에서 시원하게 미끄러져 원하던 대학 및 과에 가지는 못했지만 나는 새벽이고 주말이고 매일 이어지던 고등학교 공부에 진절머리가 났고 내가 자란 작은 도시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뒤돌아보지 않고 서울로 갔다. 새로운 세상에 가 전국 곳곳의 친구들을 사귀며 생전 처음 누려보는 달콤한 자유를 만끽했고 원하지 않던 전공은 2학년 때 어렵지 않게 바꿀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대학교 국제교류처에 교환학생 모집 공고를 보고 혹시나 하며 지원을 했던 것이 합격이 되어 대학교 2학년 2학기인 21살 때 (유럽 나이로는 19살에) 처음으로 해외, 그 때까지만 해도 지금보다 훨씬 생소했던 북유럽 국가 노르웨이에 나가서 살게 되었다. 교환학생을 떠나기 전 인생에서 제일 멀리 가 본 나라가 일본이었던 나는 그 곳에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작은 곳에서 아등바등 살아왔는지,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는지를 크게 느끼게 되었다. 노르웨이, 이탈리아, 중국, 아제르바이잔, 스페인, 미국 등등 다양한 국가 친구들의 사는 모습을 바로 가까이에서 엿보면서 말이다. 


노르웨이는 나에게 인생 첫 경험을 많이 선물해 준 곳이었다.

외국인 한 명에도 긴장했던 내가 처음으로 동서남북 외국인에 둘러싸여 대학 수업을 들어보았고, 

요리는 커녕 라면 물을 태평양 수준으로 끓여 놓던 내가 도착해서 일주일 내내 인스턴트 토마토 스파게티만 먹다가 아무래도 교환학생 끝나기 전에 토마토가 될 것 같아 처음으로 밥을 해 보았고,

지금까지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치즈 종류 중의 하나인 노르웨이 브라운 치즈를 처음 먹어보았고,

노르웨이의 한 깊은 숲 속에 들어가 처음으로 전기, 물 없는 곳에서 주말을 보내다 오기도 했고,

손 파래지도록 산에서 야생 블루베리 한 소쿠리 가득 따와서 생 블루베리 잼을 만들어 보았고, 

시간만 되면 끓어오르는 젊음의 에너지를 분출하러 파티에 가 나의 흥과 끼를 발산했으며, 

피오르드 여행 가는 날 출발 하자마자 이탈리아 친구가 운전했던 차가 과속에 걸려서 돈도 없는 주제에 당시 부과된 엄청난 벌금을 있는거 없는거 싹싹 함께 긁어 모아 냈었고, 

피오르드 도착 전에 해가 저물어 변두리 길에 텐트 쳐 놓고 기타 치고 노래 부르며 놀다가 하늘을 빼곡히 빼곡히 (빼곡히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채운 별들을 보며 잠들어 보았고,

같이 살던 스페인 친구에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페인 음식인 Tortilla de Patatas를 배웠고, 

이탈리아 친구들이 요리해 준 크림 없는 스파게티 까르보나라를 그들이 직접 양조한 맥주를 곁들여 처음 먹어 보고 껌뻑 죽다 살아났으며,

아주 뜨겁고도 찌질한 국제 연애를 해봤고,

처음으로 (그리고 이건 맹세하건데 내 인생 마지막으로) 새해 넘어가는 12월 31일 파티 날 보드카 1병을 혼자 다 마시고 2010년 첫 3일을 좀비 상태로 앓아 누워 보기도 했다. 


앉아서 하는 배움보다는 몸으로 부딪혀 얻은 살아있는 배움이었다. 그렇게 놀면서 배운 영어는 교과서에서 배운 영어보다 몇 배로 습득이 빨랐고 그 이후의 해외 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 매우 큰 자양분이 되었다.



그 이후 한국에 돌아왔지만 노르웨이에서 한 번 맛 본 해외에 대한 갈증은 나를 1년 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데려다 놓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의 두 번째 교환학생이 끝나고 나는 마음을 먹었다. 독일에 석사 공부를 하러 가기로. 그 즈음 내 대학 동기들은 부모님의 자랑이 될 대기업에 우후죽순 취직했지만 나는 독일에 가는 것이 목표였기에 그런 소식에 크게 동요되지 않았다 (실은 그들보다 조금 일찍 대기업 인턴십을 경험해 본 후 대기업에 대한 기대가 이미 와르르 무너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아 언어(독일어) 배우는 시간을 아낄 수 있는 독일 내 인터내셔널 과정을 목표로 휴학계를 냈다. 그 동안 미친듯이 영어공부를 해 내가 원하던 독일 대학에서 요구하는 영어 성적을 맞춰놓고 동시에 보습 학원에서 풀타임 강사 일을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모은 천만원을 들고 와 독일에서 인터내셔널 석사 과정 공부를 시작했고 유럽 최고의 태양 에너지 연구소라고 불리우는 프라운호퍼(Fraunhofer) 연구소에서 인턴십, 연구 보조, 석사 논문을 쓰고 또 나름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 석사 졸업 후 나는 독일어를 인텐시브로 배우며 구직활동을 시작했고 얼마 후 독일 서북부 태양에너지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은 나를 자랑스러워 하셨고 나 또한 내가 일구어 낸 해외 학업 및 취업이 뿌듯했다.


„역시“ 말을 듣는 것이 나에게 생소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 위에서 하고자 했던 일을 성취했고 신재생 에너지라는 소위 말하는 핫하고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전공을 살려 취직한 것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했다. 그렇게 나는 사회가 말하는 성공하는 삶의 루트에 와 있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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