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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Sep 13. 2018

가만히 있다간 가마니 된다

우물쭈물 하다간 우물 된다

WANNA LIST를 들여다보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이 꽤 있었다. 



나의 스트레스 배출구였던 줌바 피트니스는 일주일에 여섯번까지 갈 정도로 나에게 꼭 맞는 운동이었는데 어느 날 같이 운동하는 친구에게 "줌바가 너무 즐거운데 나 트레이너나 할까?"하고 농담삼아 얘기한 것이 생각나 리스트에 적었다. 그리고 줌바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트레이너 과정을 등록했다. 등록비가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또 그렇다고 그렇게 부담될 만큼 큰 돈도 아니었다. 다만 그 때까지 배움 쪽으로 돈을 많이 써 본 경험이 없어 (여행을 제외하고 돈을 의미 있게 잘 쓰는 법을 몰랐다) 솔직히 처음에 조금 망설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등록 버튼을 누르고 나니 홀가분한 마음과 함께 몇 주 뒤 펼쳐질 트레이닝 생각에 너무 설레었다.


그리고 몇 주 뒤 ZUMBA BASIC 1 자격증 취득을 했다. 


줌바 트레이너 된 날


함께 트레이닝 받은 사람들


다들 줌바 매니아들 답게 흥과 끼가 넘쳤다 





그리고 한국 휴가 중에는 WANNA DO LIST에 적어 놨던 도예 체험을 했다. 내가 직접 만든, 어딘가 엉성하지만 그래서 더 정감가는 그릇에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소복히 담아 먹을 때 그런 뿌듯함이 또 없다.

공방을 찾아갔다. 흙으로 막 1차 성형 마친 모습.


완성된 그릇(유약 바르기 및 마무리는 선생님이 도와주셨다)에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타이 옐로우 커리 담아 먹기. 




템플스테이를 하러 찾아간 절에서 스님과의 차담을 할 때였다. 처음 뵙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스님, 안녕하세요...." 인삿말을 하자마자 내 목소리가 떨리더니 그 동안의 모든 고민이 한꺼번에 터져서인지 제대로 말도 못하고 꺼이꺼이 울기만 했다. 그렇게 울어본 게 몇 년만인지 거기 있던 새 휴지곽 1통을 다 쓴 것 같다. 더 이상 내 인생에서 콧물이 안 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스님은 이런 가엾은 중생을 보시고는 살짝 인생의 연륜이 느껴지는 미소와 함께 말없이 조심히 차를 따라 주셨다. 30분 정도 후 조금 진정이 되었고 반은 나의 말들, 반은 흐느낌으로 스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사실 대화라기 보다는 말하는 건 나, 들으시는 분은 스님이셨다. 비록 스님께서 내 인생에 해결책을 주시지 않으셨더라도 나는 그 (일방적인?) 대화를 통해 혼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해 견고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절에서 하나 배워 나와 내 리스트에 있던 "템플스테이 통해 생각 정리하기"에 체크 표시를 했다. 

가을의 정서에 너무나 잘 어울리던 템플스테이




비록 전문가는 아니어도 한글을 가르치는 일이 하고 싶어 검색을 해보니 독일 내가 사는 도시에도, 더군다나 내가 거주하는 곳에서 자전거로 고작 10분 거리에 한글 학교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돈 버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 일손이 필요하다면 봉사도 가능하다고 교장 선생님께 이메일을 보내 드렸더니 며칠 후에 학교에 한 번 방문하라고 초대해 주셨다. 한글학교에 지금 당장 도울 거리나 교사 충원 자리는 없지만 나중에 필요하면 연락 주시겠다고 말씀하셔서 안타까웠지만 연락처만 교환하고 나왔다. 


그런데 몇 주 있다가 교장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한 선생님이 갑자기 그만두시게 되어서 혹시 내가 수업을 할 수 있냐고 연락을 주신 것이었다. 미리 인터뷰 내지 얼굴 도장을 찍어놓은 덕에 나는 또 다른 하나의 작은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이 자리가 공석이 되어서 새로운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테고 나 아니고도 여러 사람들이 그 자리에 지원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비록 내가 한국어 교원 자격증 취득자까지는 아니기도 하고(물론 더 선호되긴 하나 필수 요건은 아니다), 한국어가 모국어일지라도 언어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려면 수업 준비 할 것이 생각보다 훨씬 많지만 내가 좋아하고 의미를 두는 일을 한다는 것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이 계기를 통해서 믿게 된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의 힘이었다.


WANNA HAVE 리스트 중 하나는 식탁 위의 꽃이었는데 리스트를 쓴 그 다음날 꽃집에 들러 단 돈 10유로도 안되게 예쁜 화분과 꽃을 구입했다. 

사실 갖고 싶은 것의 목록은 10개도 채 채우지 못했다. 생각보다 내 삶에 물질적으로 필요한 게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소유하는 것에 대한 욕심과 집착도 많이 내려놓게 되었다. 그 안에 "예쁜 정원이 딸린 집"이 있다는게 함정일 수 있겠지만 그건 지금 당장 가질 수 있는 상황도, 또 지금 당장 가지고 싶은 것도 아니니 나중에 더 그 소망이 간절해질 때까지 기다릴 예정이다.



아무리 작더라도 이 성취가 삶에 주는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삶이 다양한 색으로 채워졌고 내가 나로 살아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내가 가만히 있었으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 들여다 보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노력을 했기에 이뤄냈던 것이다.


감을 바라만 본다고 해서 좋은 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설사 운이 좋아 때깔 좋은 감이 눈 앞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그건 독이 들었을 확률이 높다. 쉽게 얻은 것들은 쉽게 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easy come, easy go – 내가 몇 년째 유지하고 있는 카카오톡 프로필 문구이다). 나는 예전에 쉽게 얻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이고 그 것에 데인 적이 여러 번 있는지라 쉽게 얻게 되는 것들이 인생에게 줄 수 있는 위험성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얻은 것은 절대로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 벼락치기 시험을 본 후 그 내용을 까먹기까지는 2-3 일이면 충분하다는 걸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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