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 하다간 우물 된다
WANNA LIST를 들여다보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이 꽤 있었다.
나의 스트레스 배출구였던 줌바 피트니스는 일주일에 여섯번까지 갈 정도로 나에게 꼭 맞는 운동이었는데 어느 날 같이 운동하는 친구에게 "줌바가 너무 즐거운데 나 트레이너나 할까?"하고 농담삼아 얘기한 것이 생각나 리스트에 적었다. 그리고 줌바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트레이너 과정을 등록했다. 등록비가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또 그렇다고 그렇게 부담될 만큼 큰 돈도 아니었다. 다만 그 때까지 배움 쪽으로 돈을 많이 써 본 경험이 없어 (여행을 제외하고 돈을 의미 있게 잘 쓰는 법을 몰랐다) 솔직히 처음에 조금 망설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등록 버튼을 누르고 나니 홀가분한 마음과 함께 몇 주 뒤 펼쳐질 트레이닝 생각에 너무 설레었다.
그리고 몇 주 뒤 ZUMBA BASIC 1 자격증 취득을 했다.
그리고 한국 휴가 중에는 WANNA DO LIST에 적어 놨던 도예 체험을 했다. 내가 직접 만든, 어딘가 엉성하지만 그래서 더 정감가는 그릇에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소복히 담아 먹을 때 그런 뿌듯함이 또 없다.
템플스테이를 하러 찾아간 절에서 스님과의 차담을 할 때였다. 처음 뵙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스님, 안녕하세요...." 인삿말을 하자마자 내 목소리가 떨리더니 그 동안의 모든 고민이 한꺼번에 터져서인지 제대로 말도 못하고 꺼이꺼이 울기만 했다. 그렇게 울어본 게 몇 년만인지 거기 있던 새 휴지곽 1통을 다 쓴 것 같다. 더 이상 내 인생에서 콧물이 안 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스님은 이런 가엾은 중생을 보시고는 살짝 인생의 연륜이 느껴지는 미소와 함께 말없이 조심히 차를 따라 주셨다. 30분 정도 후 조금 진정이 되었고 반은 나의 말들, 반은 흐느낌으로 스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사실 대화라기 보다는 말하는 건 나, 들으시는 분은 스님이셨다. 비록 스님께서 내 인생에 해결책을 주시지 않으셨더라도 나는 그 (일방적인?) 대화를 통해 혼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해 견고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절에서 하나 배워 나와 내 리스트에 있던 "템플스테이 통해 생각 정리하기"에 체크 표시를 했다.
비록 전문가는 아니어도 한글을 가르치는 일이 하고 싶어 검색을 해보니 독일 내가 사는 도시에도, 더군다나 내가 거주하는 곳에서 자전거로 고작 10분 거리에 한글 학교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돈 버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 일손이 필요하다면 봉사도 가능하다고 교장 선생님께 이메일을 보내 드렸더니 며칠 후에 학교에 한 번 방문하라고 초대해 주셨다. 한글학교에 지금 당장 도울 거리나 교사 충원 자리는 없지만 나중에 필요하면 연락 주시겠다고 말씀하셔서 안타까웠지만 연락처만 교환하고 나왔다.
그런데 몇 주 있다가 교장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한 선생님이 갑자기 그만두시게 되어서 혹시 내가 수업을 할 수 있냐고 연락을 주신 것이었다. 미리 인터뷰 내지 얼굴 도장을 찍어놓은 덕에 나는 또 다른 하나의 작은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이 자리가 공석이 되어서 새로운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테고 나 아니고도 여러 사람들이 그 자리에 지원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비록 내가 한국어 교원 자격증 취득자까지는 아니기도 하고(물론 더 선호되긴 하나 필수 요건은 아니다), 한국어가 모국어일지라도 언어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려면 수업 준비 할 것이 생각보다 훨씬 많지만 내가 좋아하고 의미를 두는 일을 한다는 것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이 계기를 통해서 믿게 된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의 힘이었다.
WANNA HAVE 리스트 중 하나는 식탁 위의 꽃이었는데 리스트를 쓴 그 다음날 꽃집에 들러 단 돈 10유로도 안되게 예쁜 화분과 꽃을 구입했다.
사실 갖고 싶은 것의 목록은 10개도 채 채우지 못했다. 생각보다 내 삶에 물질적으로 필요한 게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소유하는 것에 대한 욕심과 집착도 많이 내려놓게 되었다. 그 안에 "예쁜 정원이 딸린 집"이 있다는게 함정일 수 있겠지만 그건 지금 당장 가질 수 있는 상황도, 또 지금 당장 가지고 싶은 것도 아니니 나중에 더 그 소망이 간절해질 때까지 기다릴 예정이다.
아무리 작더라도 이 성취가 삶에 주는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삶이 다양한 색으로 채워졌고 내가 나로 살아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내가 가만히 있었으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 들여다 보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노력을 했기에 이뤄냈던 것이다.
감을 바라만 본다고 해서 좋은 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설사 운이 좋아 때깔 좋은 감이 눈 앞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그건 독이 들었을 확률이 높다. 쉽게 얻은 것들은 쉽게 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easy come, easy go – 내가 몇 년째 유지하고 있는 카카오톡 프로필 문구이다). 나는 예전에 쉽게 얻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이고 그 것에 데인 적이 여러 번 있는지라 쉽게 얻게 되는 것들이 인생에게 줄 수 있는 위험성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얻은 것은 절대로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 벼락치기 시험을 본 후 그 내용을 까먹기까지는 2-3 일이면 충분하다는 걸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