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ny Mar 26. 2019

10억이면 달랐을까?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기준을 갖는다는 것

일을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이 든 때 나의 최대 관심사는 "과연 꿈꾸는 일을 이루고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며 살 수 있을까?"였다. 두번째는 경력 단절에 대한 염려였지만 첫째에 비하면 크게 와 닿는 문제는 아니었다. 


재정적인 문제는 그것보다도 한참 뒤에 있었다. 모아둔 돈이 아주 많지는 않았어도 퇴사 후 외부의 도움 없이 혼자서 몇 달 정도 의식주를 해결하며 여행을 다니고, 돌아왔을 때 다시 몇 달 정도 보통의 삶을 살 수 있는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데일 카네기의 <최악의 상황 시나리오>를 여기에 적용해 보니 내가 아무렴 깡통 빈털터리로 돌아왔어도 피자집이나 까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면 되는 게 돈이고, 조금 적게 벌면 적게 쓰면 되는 게 돈이었다. (보통 그렇듯 최악의 상황까지는 발생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돌아오고 난 후 계획했던 것보다 일이 훨씬 더 잘 풀렸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한들 여유로운 형편으로 여행을 다닌 건 아니었다. 원체 럭셔리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 것도 이유일 수 있겠지만. 호텔의 편함보다는 다소 불편하더라도 6-8인 호스텔을 택했고(피렌체에서는 정말 운 좋게도 순례길에서 만난 이탈리아 친구의 소개로 피렌체 시내 중심에 있는 아파트에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머물 수 있었다), 교통편은 최대한 미리 예약해 불필요한 경비 지출을 피했으며, 쇼핑은 일치감치 관심 밖이었다. 포르투갈/스페인 여행 및 순례길 후 가져온 것은 조개껍데기와 자석들이었고, 이탈리아에서는 몇 권의 이탈리안 요리 책 및 Rummo 파스타면과 시칠리아의 과일잼 등 식재료 뿐이었다. 


비록 넉넉하지 않은 여행이었으나 그 시간은 가지고 있던 돈으로도 즐기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돈이 좀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 적도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 생각이 스쳤다.

계좌에 10억이 있었다면 나의 여행이 달랐을까?


아니었다. 조금 더 비싸고 분위기 있는 음식을 시켰을 수 있고, 많은 고클래스의 문화적 경험을 쌓았을 수도 있고, 이코노미 대신 비지니스나 일등석에서 다리 뻗고 편히 여행을 다닐 수도 있었겠지만 10억이 없이도 충분히 맛있는 음식을 맛 볼 수 있었고, 비싼 오페라 대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 교훈을 얻었으며, 비지니스나 일등석은 10억이 있어도 내 돈 주고 타기엔 아까운 건 여전했을 것 같다. 


줄어가는 잔고를 웃으며 지켜볼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전전긍긍하지는 않았다. 나에게 맞지 않는 여행을 했었다면 그 많은 소중한 배움들을 얻을 수 있었을까? 10억, 100억이 있다한들 나는 그대로 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수분 같은 보물 단지가 있어서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을수도 모르겠으나 모든 걸 다 가지고 싶지도 않았다. 


바들바들 떨지 않았던 것은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돈에 대한 나만의 기준이 있었기에 그가 나를 컨트롤하기 이전에 내가 애증의 그것을 컨트롤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WANNA LIST의 애초 30개를 목표로 했던 WANNA HAVE 항목(인생에서 가지고 싶은 것)이 다른 항목 (WANNA BE-되고 싶은 사람, WANNA DO-하고 싶은 일)과는 다르게 2017년부터 지금까지 10개 언저리에 머무르고 있는 걸 보면 물질적으로 어떤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내 인생에서 큰 의미나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 것이 틀림 없다 - 그렇다고 소위 말하는 미니멀리스트까지는 아님을 분명히 해 둔다 -. 


그치만 이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문제이다. 나는 내가 가치를 두는 몇 가지를 정해 선택적으로 돈을 투자했을 뿐이지 부티크 쇼핑을 하거나 최고급 호텔에서 휴양을 누리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절대적으로 맞고 틀리고(right or wrong)의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돈의 문제를 떠나 어떤 사항에 대해서든 본인만의 기준을 세우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고유한 색깔을 입히는 것과 같다. 이 색은 상황에 따라 옅어지기도 하고 짙어지기도 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고집이 아닐런지?) 이렇게 물든 색은 내가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사는 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인생에 있는 수많은 결정을 내리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무거나"의 흐지부지한 의견보다는 확실한 나만의 취향을 가진 사람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이다.



자신의 기준에 따라 가치를 창출하는 소비를 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남에게 보여주기식 혹은 모방식 소비를 하는지는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지 않을까. 

늘 그렇듯 답은 알아서 정할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이냐 독일이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