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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May 22. 2020

보는 것과 하는 것

못해도 괜찮은겨

아침 일찍부터 예쁘게 도시락을 만들고 그 전날 구워놓은 스콘을 차곡차곡 챙기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던 이유는 바로 처음으로 자연 암벽등반에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암벽등반을 취미로 갖고 있는 남친 및 그의 친구들과 차를 몰아 괴팅겐 어딘가에 도착했다. 이미 중급자 이상인 그들의 차 안에는 모든 암벽등반용 장비가 완비되어 있었고 크래쉬패드(떨어짐 부상 방지용 패드)를 종아리 밑까지 짊어지고 도착한 곳에는 4m 정도 가량의 거대한 바위가 서 있었다.


여기를 올라가야 한다. 친구가 가져온 볼더링 책을 보니 이 바위를 올라가는 길이 레벨별로 10개도 넘더라.


가볍게 몸을 풀고 나서 친구들이 먼저 시범을 보여주었다. 초크를 삭삭 바르고 바위를 타는데 술술 올라간다. 옆에서 보니 어라, 할만한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내 차례가 왔다. 남자친구의 가이드로 처음 그 바위의 작디 작은 구멍 속에 볼더링 슈즈로 숨쉴 공간도 없이 꽉 잡혀진 발을 집어넣는 순간 드는 생각은 ‘아프다’. 손까지 넣어 드디어 올라가 보려고 하는데 이건 실내에서 해봤던 그 느낌이 아니었다.


뭐지? 그 단 한 발을 내딛는 움직임은 내가 저만치 거리에서 남들이 하는 걸 볼때의 쉬워보임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팔 힘도 없는데 테크닉도 없는 왕초보자라 5번의 시도도 채 되지 않아 급 피곤함이 몰려왔다. 실내에서 했던 암벽등반은 처음부터 나름 곧잘 했는데 쉬운 난이도가 거의 없는 야외는 나에게 (개뿔도 없는 주제에)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잠시 휴식 후 다시 도전. 친구들의 도움으로 코털만큼의 발전은 있었지만 또 다시 떨어졌다. 쉬워 보였던 게 풀리지 않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하지만 이게 또 오기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게 함정.


15번 정도 시도 후 결국 그 루트를 포기하고 다른 루트를 해 보기로 한다. 여기서 팔을 이렇게 옮기고 나서 나서 왼발을 이 구멍에서 이 구멍으로. 이론적으로 생각해보면 또 하나의 쉬운 루트였다.

호기롭게 올라가보지만 다시 몇 발 못 움직이고 떨어졌다.


하아... 내가 (또 개뿔도 없지만) 이렇게도 나약한가.. 슬슬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하는데 그래도 다시 도전해 보기로 했다. 결과는 똑같은데서 다시 추락.


다른 2군데도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엔 단 하나도 내가 성공한 루트는 없었고 어깨 및 팔에 힘은 소진되어 물병을 드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처음부터 잘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그러나 초보자인 나에게 보이는 것과 직접 해 보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근데 못하면 어때서?

설레임으로 가득찬 야외 암벽등반이 나에 대한 실망감으로 바뀜을 인지하고 드는 생각은 이거였다.

내가 이 루트를 성공했다면 조금 더 고무적이긴 했겠지만 못한다고 좌절할 일은 또 아닌거다.

못해도 괜찮은 거였다. (포기가 빠를 땐 또 빠르다.)

그래 나는 재밌을려고  거지 스트레스 받으려고   아니잖아? 

그 후에는 나 대신 친구들이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휴 스포츠 선수로 안 태어난 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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