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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대리 Dec 05. 2019

넘 열심히 하지 마

- 젤 우스운 농담 한마디


회식을 했다.


연말이라서 몇 개의 팀을 모아 이사장님까지 참석한 나름의 송년회였다.

참석여부를 묻는 후배의 질문에 나는 처음으로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나 분위기상 다 참석하는 것만 같은 느낌에 가기 싫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 채 팀원들과 함께 회식장소로 발길을 돌렸다.


그냥 열심히 고기만 먹었다


지글지글 구워지는 삼겹살과 김치가 불판 위에서 익어가자 자연스럽게 앞에 놓인 잔이 채워졌다.

이런저런 농담이 오고 가고 조금 늦게 도착한 이사장님의 개미 목소리만 한 건배사가 지나가자 회식이 막바지를 향해갔다.


"최대리 얼굴이 진짜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어.
예전 총무부에 있었을 때는 얼굴이 진짜 어두웠었는데.."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다른 팀의 팀장님이 입사 초기의 찌질했던 내 모습이 생각나셨는지 얘기를 먼저 꺼내다.


"그때는 신입이기도 했었고 여러모로 많이 힘들었어요."


나는 팀장님께 그때 못한 심경고백을 하며 웃어 보이자 그분이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보태신다.


"그렇지. 최대리는 참 열심히 해.
나랑 같이 일했을 때도 그랬고 그때 총무부에 있을 때도 보면 일이 진짜 많았는데도 다 해냈어. 그렇지?
근데 최대리 너무 열심히 하지 마.
최대리는 열심히만 하고 넘 일한 티를 안 내.
최대리도 좀 본인이 열심히 하는 거에 대해서 티를 좀 낼 필요가 있어."



그분의 조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열심히 한다는 칭찬의 의미인 건지 열심히는 하는데 일한 티는 안 난다는 역설적인 표현질책인 건지 그분이 따라준 술을 한잔 입안으로 넘기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그 얘기가 곱씹어졌다.





또 인사의 시기가 왔다.


아마 그분이 꺼낸 그 얘기도 승진인사의 시기가 다가왔기 때문에 꺼내신 얘기 셨을 것이다.


우리 회사는 몇 해 전부터 인사예고제라는 정책의 일환으로 미리 인사의 시기와 승진자의 수를 문서로 지를 하고 있는데 김대리는 그 인사예고에서 쓰인 단어들에 비위가 상한다고 메시지를 보내지만 사실 나는 그 문서를 자세히 지를 않았다.


공정한 인사제도를 위한~이라는 문장이 들어간다는 김대리의 얘기에 나도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괜스레 속이 울렁거렸다.


자꾸만 올초의 상처가 되살아나는 것처럼 속이 따끔거리기도 했고 이번 연말까지도 그런 사람들의 저울질과 입방아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그 문서를 읽으신 우리 팀 팀장님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오늘 송년회 자리에 가서 이사장님께 술이라도 한잔 따라주라며 얘기하셨지만 내 이름도 존재도 모르는 그분에게 술을 따라준다한들 인사가 달라지겠나 싶은 씁쓸함에 입술 끝이 들썩거렸다.


결과적으로야 이사장님이 테이블을 돌며 참석한 모든 직원들과 술 한잔을 주고받았기에 나도 술 한잔은 따라준 꼴이 되어버렸지만 그분이 나에게 건네는 얘기가 귀에 하나도 안 들어온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열심히 일해도 안 되는 승진이 그런 술자리와 티 내는 행동들에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으면서도 못내 그런 것들이 또다시 씁쓸하게 다가오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김대리의 얘기대로 인사예고제를 담은 문서를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았다.


2020년도 정기인사의 ~ 인사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김대리 말대로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올 한 해 들은 유머 중에서 가장 폭소 터지는 유머를 들은 것처럼 나는 한참을 문서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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