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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대리 Jun 23. 2020

쿨하지 못해 미안해

-  쿨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냥 기대가 많은 인간이었다


즐겨보던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커리어우먼의 모습처럼 되고 싶었다.


처음에는 실수투성이에 우여곡절을 좀 겪겠지만 차츰차츰 성장하여 어느 순간 냉철하면서도 깔끔하게 업무를 처리하여 인정받는.. 그런 커리어우먼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 허상에 불구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쌓이는 건 커리어나 능력이 아니라 잔기술과 꼼수인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나의 직장생활이 과연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를 여러 번 되묻곤 했었다.


특히 나는 냉철하게 업무를 처리하기에는 때론 지나치게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무표정한 얼굴, 웃음보다는 그냥 뚱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표현에 인색한 나임에도 가 내 자신을 지나치게 감정적이라고 표현하는 데에는 그런 나의 겉모습과는 전혀 다른 카스텔라같이 부드럽다 못해 쉽게 뭉개지는 여린 마음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업무를 하다가도 격한 말투의 민원인과 통화라도 하게 되는 날이면 나는 나도 모르게 하루 종일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어될 때가 많았고 머릿속은 그 순간의 기억들로 가득 맴돌았다.


그렇기에 나는 회사에서 그런 민원인들을 상대하면서도 표정이나 말투가 하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신기하면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흥분하기 시작하면 말투부터 떨려오는 하수인 나와는 달리 그 상대방이 아무리 어거지를 쓰고 격한 언사를 표현해도 침착하게 듣고 있다가 할 말을 다한 후 아무렇지 않게 통화를 끝내버리는 그들이 왠지 인생 고수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고백하자면 오늘도 나에게는 그런 가슴 울렁거리는 일이 있었다.


저번 주부터 얘기를 해왔던 민원인이었는데 차분한 말투로 서로의 상황을 나누었기에 얘기가 잘 끝날 것이라고 판단했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판단이 오해라는 것을 알려주듯 그분은 이번 주 월요일부터 다시 찾아와 다 끝난 것만 같던 얘기를 꺼내며 하나둘씩 따지기 시작했다.


나는 울렁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얼굴에는 최대한의 미소를 말투는 최대한의 친절함과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그분은 도돌이표같이 반복되는 얘기들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는 결국 마음대로 하라는 일언지하의 말을 남기고 사라졌고 나는 그대로 마음을 접었는데 몇 시간 후 해맑은 표정으로 다시 찾아와서는 우리 쪽에서 하자는 대로 하겠다며 서류를 제출하러 왔다.


나는 다시 시간을 들여 그분의 도돌이표 같은 사정을 다시 한번 풀스토리로 듣고 다시 내가 하려던 설명까지 완전히 마친 후 기분 좋게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아침 그분은 또 등장하셨다.


다른 얘기로 우선 말을 꺼냈지만.. 결국 며칠간을 공들여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그래서 납득했다고 혼자 오해했었던 그 얘기였다.


다시 하나하나 트집을 잡으며 이해할 수 없다고 얘기하는 그분을 보며 나도 모르게 참고 있었던 울렁거림이 파도처럼 터져 나왔다.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이미 설명 다 드렸고 수긍하시고 동의하셔서 절차 진행 중인데 자꾸 왜 말을 바꾸시는 거예요!!"


나의 큰소리에 그분 또한 격앙된 톤으로 대답하셨고 결국 차장님께서 오셔서 그냥 우리 기관의 규정대로 이대로  진행하겠다며 마무리를 지으셨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진정하고 처리해야 할 일들을 살펴보는데 하나도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분의 반복되는 말바꿈이 짜증 나기도 한 거였겠지만 늘 마음먹었던 것과 달리 내 감정을 표출해버린 것이 더 짜증이 나고 후회가 되었다.


잠시 마음을 고르고 컴퓨터 모니터로 깜빡거리는 업무처리 버튼들을 무심히 바라보다 결국 김대리에게 먼저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이런 일이 있어서 너무 짜증이 났는데 나는 그런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침착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마음부터 울렁거리는 내가 싫다며 투덜거리자 김대리가 대답했다.


"그렇게 사람과의 대화에서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만큼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


김대리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과장님 한분이 생각났다.


그분은 행동도 말투도 정말 느릿한 편이셨는데 민원인을 상대하면서 한 번도 흥분을 하거나 화를 내는걸 나는 본 적이 없었다.


친절한 말투라고 하기도 애매하지만 늘 똑같은 톤과 높낮이로 느릿느릿 자신이 할 말을 하는 그분을 보며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예상외의 황당한 답변을 내놓으셨다.


"그냥  그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면 난 수화기를 귀에서 좀 멀리 떨어뜨려서 들어.
그리고 얘기가 지리멸 멸하게 길어지면 중간중간 딴생각을  하기도 하고.
그냥 그런 사람들이 원하는 건 대부분 한 가지일 때가 많거든.
자기 얘기 끝까지 들어주는 거.
그냥 그것만 해주면 된다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


생각해보면 김대리나 과장님의 말처럼 기대를 버리면 될 일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으니 상대가 이해해줄 것이라는 기대.

나의  상식이 저 사람에게도 통하는 상식일 것이라는 기대.

내가 그러니 상대도 당연하게 그럴 것이라는 기대.


어쩜 그런 기대들이 사람들에 대한 울렁거림과 마음의 상처라는 뒤끝을 남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런 기대를 버리기 전까지는 나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쿨한 커리어우먼 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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