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쉬어보면 제대로 쉴 줄 모른다
온타나스에서 묵은 알베르게는 사설인데도 가격이 5유로밖에 안했다. 시설도 괜찮았는데 제일 좋았던건 바로 침대. 보통의 알베르게의 2층침대는 1층을 배정받아도 2층과의 간격이 너무 좁아서 침대 위에서 뭘 하는게 어려웠는데 여기 침대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도 머리가 윗침대에 닿지 않아서 편했다. 이 정도의 침대만 배정받아도 하루 반나절이 행복하다.
저녁밥을 먹으러 나갔는데 어디서 "꼬레아!" 하는 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수비리 마을에서 만났던 브라질 할아버지친구들 3인방이었다. 나를 용케 기억해주시고 반갑게 인사도 나눴다. 걸음이 느린 내가 역시 다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다. 그래도 좋다. 친절하게 눈 맞추고 웃으며 반갑게 "올라!" 하고 인사하면 마음이 안정된달까.
오늘은 아침에 걷다가 한국 사람들을 만났다. 뒤에서 한국 말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내 또래 청년 4명이 듬직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금세 나를 지나쳐 갔는데 우연히 다음 마을 Bar에서 다시 마주쳤다. 오랜만에 만난 한국분들과 아침을 먹으며 간단히 얘기를 나눴다.
여기 온 한국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나처럼 회사를 그만두고 온 퇴직자다. 보통 순례길을 다 걸으려면 최소한 한 달은 잡고 와야하는데 그만큼의 여유를 부릴 수 있으려면 결국 직장에 구애받지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역설적인 증거다. 이번 무리 중 한분이 역시 퇴사자였다. "다들 그런가봐요" 하고 서로 허허 웃었다. 걸어올 수 있으면 자신들의 목적지까지 걸어와서 같이 저녁을 먹자 하셨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길에서 만난 모든 한국사람들은 나보다 월등히 빠르고 튼튼하다.
폐인 차림으로 터덜터덜 걷다가 브라질 아저씨를 만났다. 여느때처럼 스쳐 지나갈 수 있었던 인연인데, 내리막길을 스키선수처럼 지그재그 내려가는 모습이 신기해 말을 걸었다. 이름은 다비드(!). 다비드 상 얘기했더니 맞다고 웃었다. 휴가를 내고 이 곳 산티아고로 날아왔다는 그는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해했다.
다비드 아저씨는 아마 길에서 만난 인연들 중 나와 가장 오래 같이 걸었던 사람일 것이다. 속도가 우연찮게 비슷했고 얘기하면서 걸으니 나름대로 걸을만 했다. 그러다 좀 힘들어질 때쯤 벤치에 앉았다 가겠다고 했더니 그도 같이 쉬겠다고 해서 함께 앉았다. 경로를 확인하고 목좀 축이고 곧바로 다시 일어서는데, 다비드 아저씨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왜 벌써 일어나?"
고기도 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쉬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길 위에서의 쉼이란 온전하지 못한 쉼이었다. 다비드는 쉬겠다고 했던 내가 무언가에 쫓기듯 용건만 해결하고 곧바로 일어나는 모습을 보곤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아직 제대로 쉬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그렇게 먼저 일어난 나는 얼마 못 걷고 이테로 델 카스티요 Itero del Castillo 라는 마을로 우회해 들어갔다. 까미노 길에 있지 않고 1km 정도를 돌아서 들어가야 하는 매우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의 알베르게도 하나, 수용 인원은 딱 12명. 침대를 받고보니 첫 손님이었다. 이러다 혼자 자는건 아니겠지.
다행히 남자, 여자 일행이 들어왔다. 뉴욕에서 온 조던과 영국에서 온 핫산이었다. 함께 마을을 구경하자고 해서 알베르게를 나섰다. 이테로 델 카스티요는 정말 정말 작은 동네였다. 마을 안에 Bar도 하나밖에 없어서 온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알베르게 운영하는 여자분이 Bar까지 함께 운영중이었다. 그러면서 4-5살 되어보이는 여자아이까지 보는 모습을 보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핫산은 원래 순례길을 걷던중이 아니었는데 휴가를 받아 친구 조던을 보러 귀한 3일휴가를 순례길에 다 썼다고 했다. 신기해서 둘이 커플이냐고 물어봤는데 조던이 단호박 표정으로 Just friend 라고 못박는 것. 음, 내가 본 핫산의 눈빛은 친구 이상의 눈빛이었는데.
마을이 갑자기 시끌벅적해지길래 왜 그런지 봤더니 오늘 사이클 경기가 있는데 이 마을을 지나간다고 했다. 교통 통제를 마을 이장님(?)이 하셨는데 정말 소박하게 빨간 띠만 쳐놓고 자동차가 오면 띠를 들어서 지나가게 해주셨다. 소박한 시골마을답다 생각했다. 이윽고 속력을 내며 지나가는 사이클 선수들에게 마을 사람들 전부가 환호하고 박수쳤다. 때묻지않은 순수함을 본 기분이었다.
작은 마을은 이렇게 기대하지 않았던 매력이 흘러넘친다. 단 세명이 묵게된 알베르게도, 우연히 구경한 사이클 대회도 순례길에서 만난 특별한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