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하게 캐묻지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길
어젯밤 함께 묵었던 조던과 핫산은 일정이 있다며 새벽 3시반에 떠났다. 대단한 부지런함. 나는 평소대로 아침 6시에 눈을 떴는데 숙소에 나 혼자 남겨진 적은 처음이었다. 알베르게 주인분까지 보이지 않아 괜히 무섭기까지 했다.
여기서 가장 편한점 중에 하나는 굳이 꾸미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화장을 할 필요도 없고 옷을 신경써서 입지 않아도 된다. 세수하고 곧바로 수분크림만 한번 바르고 선크림 꾸덕하게 칠하면 나갈준비 완료. 햇빛을 많이 받아 기미가 생기려고 하는 것만 빼고는 크게 문제가 없다. 예전에 비하면 거의 원시인처럼 다니는 느낌. 꾸미는 것에 재능이 없는 내겐 최적의 환경이다.
일곱시 쯤 길을 나서는데 아직도 하늘엔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이제 태양은 내 등 뒤에서 떠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데 달은 자리를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해가 뜨면 달이 지고, 달이 떠오르면 해가 사라지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는데 한 하늘에 둘이 공존하는 모습은 신선하기 짝이없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프로미스타. 17km만 걸으면 된다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나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 마음이 다르다고 아침 초반의 마음은 몇 시간 가지 않는다. 요즘엔 세시간 열심히 걸으면 발목이 아파서 근처 bar에 들어가 커피 한잔에 아침을 먹고, 다시 일어나서는 한 시간에 한 번씩 길바닥에 앉아서 기진맥진한 채로 반 강제 휴식을 취하다 한시~두시 사이에 숙소로 도착하는 일정을 반복하고 있다.
프로미스타 까지 가는 길에는 작은 마을들이 줄지어 있었다. 이쯤 오니 마을명이 길고 어려워서 사진을 찍어두지 않으면 외우기가 어렵다. 외국의 지명이나 사람 이름은 여전히 내겐 어렵디 어렵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통성명을 해도 세번 이상 듣지 않으면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은 내 이름을 잘 기억해준다. 이름을 물어볼때 나도 모르게 "아영"보다는 전 회사의 닉네임이었던 "Soy"를 자주 말하는데 아무래도 "아영"보다는 호응이 좋다.
프로미스타는 수문이 있는 도시다. 그래서 이번 까미노 길은 얕은 개울을 따라 걷는 길이었다. 물가를 따라 걷는건 운치있어 보이지만 작은 날벌레들이 얼굴로 계속 달겨들어 생각만큼 로맨틱하지는 않았다. 이름모를 벌레들과 씨름하며 햇빛을 직빵으로 맞으며 걸으니 체력이 금방 소진됐다.
그저께 발에 처음으로 물집이 잡혔다. 엄지발가락 옆과 발뒤꿈치애 사이좋게 하나씩. 신기하게 왼발과 오른발에 잡힌 물집들이 대칭을 이룬다. 걸음걸이에 따라 물집이 생기는걸텐데 내 걸음걸이는 뒤꿈치의 바깥쪽, 발 앞부분의 안쪽을 자주 쓰는 걸음걸인가보다. 물집을 건드리지 않고 걷기위해 걸음모양새가 점점 우스꽝스러워진다.
기진맥진 체력이 다 떨어져갈때쯤 프로미스타에 도착했다. 역시 17km라도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고생한 날이기에 점심을 정말 맛있게 먹어야지 다짐하고 앉은 식당에는 많은 메뉴들이 날 유혹하고 있었다. 고심끝에 고른 미트볼 라자냐와 샐러드. 한 입 잘라 입에 넣은 순간 온 몸으로 행복감이 몰려왔다. 이거다 이거. 한동안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채로 살았는데 오늘의 점심은 정말 맛있었다.
씻고 빨래하고 쉬다가 동네 마트에 가서 맥주 한 캔을 사들고 정원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낮에는 주로 이렇게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쓴다. 쉬면서 보려고 전자책을 가져왔는데 이 곳에서는 책이 정말 잘 읽힌다. 한국에서는 책 말고도 읽을 거리들, 볼 거리들, 놀 거리들이 차고 넘쳐서 오히려 책 읽을 시간이 많이 없었는데 여기서는 책 읽기 딱 좋은 환경이다. 예전에 읽었던 '디 마이너스'를 하루만에 다시 다 읽었는데 우연히 산티아고 순례길 대목을 발견해 반가웠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여기저기서 '산티아고 순례길'의 흔적만 봐도 그리워지겠지.
그렇게 앉아있는데 익숙한 한국말 소리가 들린다. 아, 한국인들이다. 그들도 나를 보고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수비리에서 마주쳤던 부부와 새로 인사를 나눈 청년. 청년은 10일부터 걷기 시작했는데 이미 버스도 한 번 탄 나와 같은 숙소에서 묵고 있다. 오래 걸은 날은 50km 까지도 걸었다고 한다. 대단한 사람. 무릎 조심하시라고 서로 걱정해주며 웃었다.
이 곳에서 만나는 한국 사람들과는 한국인들의 최대 고민 직장, 결혼, 진로 등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저 걸어왔던 길,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순례길은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주는 그런 마음넓은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