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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걷는길 (21) 아스트로가~라바날델카미노

비를 맞으며 지난날의 상처를 떠올리다

by 신아영

아스트로가 Astroga - 라바날 델 카미노 Rabanal del Camino 22km


비오는 아스트로가

아침부터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렸다. 한 번도 비를 맞으며 걸은 적이 없어서 챙겨온 판쵸 우의가 민망할 지경이었는데 드디어 이를 개시할 때가 왔다. 빨간색 우의를 뒤집어 쓰니 키도 작아서 그냥 작은 텐트 하나가 걸어다니는 것 같다. 키가 작아 유일하게 좋은 점은 우의가 나의 몸뚱이를 남는 곳 없이 다 가려준다는 것.

비가 내리는 것을 알고 본격적으로 비를 맞으러(!) 나가는 건 처음이었다. 이 비를 뚫고 다음 마을까지 가야하는데. 빗줄기는 좀처럼 약해질 생각이 없다. 우의에 빗방울이 투둑투둑 떨어지고, 나는 비가 아니라 빗소리를 맞으며 걸었다. 비가 내 몸을 두들기며 만들어내는 리듬이 기분 좋았다. 그렇지만 우비가 다 막아내지 못하는 빗물들이 신발에 침투하면서 점점 나는 축축해져 갔다.

키가 작아선지 뒤집어쓴 판초우의가 우스꽝스럽다

여름 까미노는 가장 사람이 붐빌 때라고 하던데, 나는 걸음이 느려선지 정말 홀로걷는 까미노를 수행중이다. 번잡하지 않아서 좋고 혼자 생각할 시간도 많다. 오늘따아 비도오고 혼자 걸으며 센치해지는 감정이 극대화되며 여러 상념에 빠졌다.

왜 그랬을까. 걷고 있는데 뜬금없이 대학 4학년 수업 후 가졌던 뒷풀이 자리가 생각났다. 술을 먹고있는데 갑자기 술취한 선배 한명이 와서는 "넌 못생겨서 보기가 싫어"라는거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못들은 척 하고 넘겼었는데 몇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스페인에서 왜 그 일이 생각났을까.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남기고간 상처가 아직도 무의식중에 치유되지 않은채로 남아있었나보다. 그래서 더 치열하게 그간 나를 아프게 했던 "말"들에 대해 생각했다. 살아오면서 여러 말들이 나를 아프게해왔었는데, 대부분은 나의 외모와 관련한 말들이 많았다.

마음 아픈 말들을 들었을때 나는 보통 현실을 회피하곤 했다. 그 일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기억에서 싹 다 지워버리려 노력했는데 이렇게 뜬금없는 타이밍에 지난줄 알았던 생채기들이 나를 아프게 하는거다.

오늘 까미노 길에서 맞았던 비는 누군가가 내게 던지는 말들과 같았다. 비를 맞으며 느꼈던 기분좋음 처럼 누군가의 말이 나를 기분좋게 할때도 있지만, 미처 막아내지 못한 빗방울이 신발을 젖게하듯 나를향한 비난의 말을 막아내지 못할 땐 마음에 생채기가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는 언제든 계속 내릴것이고 악의없는 사람들의 말에 나는 언제든 상처받을 수 있다. 중요한건 비가온 후, 상처를 받은 후다.

목적지였던 라바날 델 카미노 마을에 도착해 곧바로 한 일은 젖은 신발에 신문지를 구겨넣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면 신발의 습기를 신문지가 흡수해 좀 더 빠르게 신발이 마르기 때문이다.


내일 더 잘걷기 위해 신발에 신문지를 넣어 습기를 제거하는 것처럼 내일의 인생을 위해 그동안 습기먹었던 마음을 잘 다독여주는 시간도 가져야겠다.



비가그친 후 나타난 까미노 안내판엔 거짓말처럼 무지개가 그려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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