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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걷는길 (22) 라바날 델 까미노~엘 아쎄보

길 위에서의 우연이 선물하는 소소한 행복들

by 신아영

라바날 델 까미노 Rabanal del Camino - 엘 아쎄보 El acebo 20km



까미노가 진행될수록 순례자들은 더 부지런해지는 모양이다. 오늘은 다섯시부터 함께 묵은 순례자들이 부스럭대서 나도 덩달아 일찍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밖을 나서니 아직도 칠흑같은 어둠이다. 별 생각없이 길을 나서려는데, 내 눈앞에 은하수가 펼쳐졌다. 산골 마을이라 그런지 컴컴한 하늘에 수많은 별이 수놓아져 있었다. 넋놓고 한참 바라봤다.

아쉬움에 하늘을 찍어봐도 사진엔 손톱만한 달밖엔 보이지 않는다.

하늘을 보는데 때마침 별똥별이 떨어진다. 말도 안되는 장관을 혼자 보고있는게 너무 아까울 지경이었다. 스페인은 보통 일곱시 반 정도에 해가떠서 일찍 나오면 수많은 별을 보다가 해뜨는 장면까지 한번에 볼 수 있다. 평생에 볼 일출 장면을 여기서 몰아보는 느낌.

점점 고도가 올라가고 있다

걷는 길이 점점 험해지더니 곧 산으로 진입했다.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은 후로 본격적인 산을 탄 적은 없었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산을 넘나보다. 산길은 돌도많고 험하지만 햇빛을 가려줘서 조금 더 시원하게 걸을 수 있는것이 장점이다. 가는길에 작은 꽃들이 피어있었는데 그때문인지 벌이 정말 많았다. 벌이 혹시라도 나를 쏠까봐 가면서 움찔움찔 몸을 사리게 된다.

한창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는데 어느 지점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 살짝 가방을 놓고 구경하는데 뭔가 분위기가 경건하다. 한 명씩 돌무덤을 밟고 올라가 십자가를 잡고 기도를 하고, 밑에 있는 사람들은 단체로 기도문을 외고 있었다. 한참 기도문을 외우던 사람들은 기도를 마치고 서로 감격해 포옹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눈물까지 보이고 있었다.

뭔가 특별한 장소인듯 싶어 핸드폰을 켜 검색해보니 이 곳이 바로 철의 십자가 구간이었다. 고향에서 돌을 가져와 이 곳에 쌓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곳이다. 나는 한국의 돌따위를 가져온게 없어서 내가 갖고있던 대일밴드 하나를 십자가에 붙이고 왔다.

철의 십자가에서 소원을 비는 사람들

밴드를 붙이며 어떤 소원을 빌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사소한 일에 마음쓰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고 있었다. 작은 일은 눈 감아주고 큰 일에는 내 목소리를 내면서 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품어왔던 작은 소망들보다 왜 이게 먼저 떠올랐을까. 아직도 이유는 잘 모르겠다.

철의십자가에서 만난 노란리본. 잊지말자.

철의 십자가 구간을 지나서도 험한 산세는 계속됐다. 정말 열심히 오르막을 오르고 또 오르다 언덕을 넘었을 때 이동식 Bar가 보이는데, 절묘한 위치선정 덕에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쉬어가고 있었다. 나도 여기서 짐을 풀고 머핀과 오렌지주스를 사서 벌컥벌컥 흡입. 산 위를 오를땐 오렌지주스가 제격이다.

한 숨 돌리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엘 아쎄보 라는 작은 마을이다. 걸음을 걷다 우연히 한국분 한분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는데 뭔가 잔잔한 설교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의 위안을 얻은 시간이었다. 이윽고 엘 아쎄보에 도착해 오렌지주스를 한잔씩 마시며 헤어지려는데 동행했던 분이 사실 자기는 천주교 신부라고 하시는게 아닌가! 오며가며 만났던 한국인 분들이 이 길위에 신부님이 계시다고 얘기해주셨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신부님과의 위안의 시간을 끝내고 엘 아쎄보에서 묵을 숙소를 탐색했다. 엘 아쎄보에는 기부제로 운영중인 알베르게가 있는데 한시 쯤 가보니 오픈이 3시라고 적혀 있었다. 고민 끝에 10유로짜리 숙소를 선택했는데, 이럴수가. 여기 수영장까지 갖춰진 최고급 숙소였다. 여기보다 더 시설이 안좋아도 더 돈을 많이받았던 곳이 수두룩했는데 10유로에 수영장이라니 가히 순례자들의 천국이라 부름직했다.

수영장이 딸린 알베르게는 처음이다! 오예

숙소에 짐을 풀고 쉬고있얼는데 함께 방을쓰는 사람이 들어왔다. 무심결에 인사를 나눴는데 서로 얼굴을 보고 "앗!"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예전에 프로미스타에서 잠깐 인사하고 맥주를 함께 마셨던 동진이었다. 정말 잘 걷는다더니 버스를 타고온 나와 일정이 맞게 될 줄이야. 오늘은 우연한 반가움의 연속이다.

수영장에 나가 선베드에 누워 맥주를 한 캔 마셨다. 쏟아지는 햇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 곳은 순례길이 아니라 휴양지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의도치않게 순례자가 아닌 여행자 컨셉이다.

밥을 먹고 들어와 테라스로 나갔더니 내가 오늘 넘어온 산 뒤로 석양이 지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알고보니 오늘 내가 넘은 산이 해발 1,500m라고..! 동네 뒷산 오르는 마음으로 걸었는데 생각보다 높이 올라온 것에 놀랍기만 하다. 인생의 산들도 이렇게 꾸준히 걷다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넘을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해본다.


숙소에서 바라본 해 지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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