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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걷는길 (23) 엘 아쎄보에서 폰페라다까지

함께 걸으면 더 빨리, 멀리 걷는다

by 신아영

엘 아쎄보 El Acebo - 폰테라다 Ponferrada 17km



여느때처럼 새벽 여섯시 즈음 눈을 떴다. 나가려고 준비를 하는데 동진이가 오늘 루트는 급경사로 이어지는 내리막이라 어두울 때 나가면 위험하다고 일러줬다. 그러면서 자기도 오늘 폰페라다 까지만 갈 예정이니 함께 걷자고 제안했다.

누군가와 순례길 구간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본 적이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 길 위에서 나는 내노라하는 느린 사람이었고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주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 먼저 가라고 몇 번씩 말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은 걸을 거리가 짧아 나도 자신이 있었고 마침 목적지까지 같아 부담없이 승낙했다.

미리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해가 뜨는 것을 기다리다 깜박 잠이들었다. 30여 분을 잤는데 정말 깊게 잠들었다. 요즘은 이런식의 쪽잠이 그렇게 달 수가 없다. 다시 정신차리고 일어나 Bar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8시경 길을 나섰다.

이 높은 산을 이제 내려간다

동진이의 말처럼 폰페라다까지 가는 길은 험하고도 험했다. 레온 지나면서부터 내리막에 돌길이 이어진다더니 정말이었다. 중간중간 완만하게 돌아가는 길과 급경사로 이어지는 지름길에서 우리는 고민했다. 어차피 선택은 자유, 그에따른 책임도 우리의 몫. 때로는 완만한 길로 돌아가다 여유가 생기면 지름길도 걸어보곤 했다.

그동안은 일행이 없어서 한 번도 숙소에서 저녁을 해먹지 못했는데 동진이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스페인은 고기가 어마어마하게 싼데 그걸 보고도 같이 구워먹을 사람이 없어 지나쳐야하는 슬픔이란. (물론 혼자 구워먹을 수도 있지만 고기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남는게 낭패다.) 오늘은 일행이 생겼으니 숙소에 가면 꼭 삼겹살을 구워먹자고 굳은 결의를 했다. 한 걸음에 삼겹살 한 점을 떠올리며 힘차게 전진.

나의 느린 걸음이 동진이를 설사 방해할까봐 노심초사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더니 내 평소걸음보다 약 한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아침에도 늦게 나오고 평소 간단히 먹던 아침도 여유롭게 먹었는데도!

그동안은 이야기하면서 걸으면 에너지가 분산되어 더 힘들줄 알고 항상 입을 꾹 다물고 걸음에 집중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함께 걸으니 통증을 잊고 열심히 떠들었고 나보다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에 나도 모르게 가속도가 붙었나보다. 함께걸으면 멀리 걸을 수 있다던 구호가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예쁜 폰페라다 알베르게


우리가 묵은 폰페라다 알베르게는 기부제로 운영중인 알베르게였다. 짐을 푸는데 가족끼리 순례길을 걷고있는 한국인 가족을 만났다. 얼마만에 형성된 한국인 무리인지. 우리는 함께 저녁을 해먹자고 다짐한 후 함께 폰페라다 성벽을 구경했다. 남자 형제 둘과 부모님으로 구성된 조합이었는데 형제분들이 둘 다 스페인어를 잘해서 부러웠다. 외국에 있으면 외국어 공부욕구가 역시 샘솟는다.

이 가족은 특이한 음식을 시도해보는게 특기라고 하시면서 소 귀를 맛보러 가자고 하셨다. 생소했지만 나도 이참에 도전. 맛은 약간 쫄깃하면서 순대에 들어간 내장 맛과 비슷했다. 간단히 맥주한잔을 곁들인 후 본격적인 밥을 해먹으러 마트를 찾는데, 맙소사. 여기 일요일이라 그런지 고기를 살 수 있는 큰 마트들이 죄다 문을 닫았다.

오랜만에 한식을 먹을 수 있겠다던 기대감이 사라져 엄청나게 좌절중인 나를 보시며 꿩대신 닭이라고 볶음밥을 해먹자고 하셨다. 양념된 소세지처럼 생긴 고기와 야채류, 쌀을 사와서 다같이 요리를 했다. 쌀을 씻어 뚜껑도 없는 냄비에 앉힌 후 버섯을 다듬고 피망과 양파를 송송 썰어서 올리브 오일에 볶았다.

냄비에 육인분 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다. 맛있었다 정말로

아무런 양념도 없이 고기와 야채, 겉은 타고 속은 덜익은 밥을 볶아서 거의 떡처럼 된 볶음밥이 완성됐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맛있던지. 커피잔에 와인을 따르고 티스푼으로 볶음밥을 먹었다. 인생 볶음밥으로 인정.

오랜만에 한국어로 열심히 떠들고 또 떠들었다. 각자 걸어오는 길에서 만났던 추억들, 괴로움과 기쁨을 공유했다. 나는 이제 내일 버스를 타고 이들은 또다시 걷는다. 언젠간 다시 길에서 만나겠지, 하며 헤어지는 아쉬움을 달래본다.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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