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의 끝은 현실로의 복귀임을
일정을 맞추기 위해 다시한번 버스를 타야하는 날이었다. 남들은 하루에 35km~40km까지도 걷는다는데 나는 그렇게 걷지 못해서 계속 중간중간 버스를 탄다. 반쪽짜리 순례길, 순례자.
살펴보니 폰페라다에서 사리아까지는 곧바로 가는 버스가 없어서 지난번처럼 대도시인 루고에서 한번 환승하는 식으로 사리아에 가기로 결정했다. 어쩌다보니 의도치않게 스페인 북부의 큰 도시를 죄다 훑고 가는 느낌이다.
폰페라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오전 8시, 루고로 가는 버스는 12시 30분. 시간이 애매해 타미널에서 꼼짝없이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 터미널에서는 와이파이 연결이 됐고, 내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한국 세상에 접속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완전히 순례자인 것도 잊고 있었다. 인터넷이 자유로울 땐 곧바로 한국의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뉴스를 본다. 달력을 보니 돌아갈 날이 머지않은 상황인 것도 문득 깨닫고 다음 일할 회사를 찾는 작업도 한다.
어느덧 터미널 안 작은 cafeteria에 자리잡고 추천받은 회사에 제출할 자기소개서도 조금씩 쓰고 있었다. 어제까지만해도 숲길을 걷던 순례자인데 오늘은 한국에서의 미래를 준비하다니. 이 길의 끝은 결국 현실로의 복귀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던 시간이었다.
여기 와서 탄 버스들 중 제일 좋은 브랜드(?)는 ALSA 버스였는데 오늘 내가 타는 버스도 ALSA 버스다. 땅덩어리가 큰 스페인에서는 버스 한 번을 타도 기본 1-2시간은 타야하는 장거리 버스가 많다. 장거리를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승객들에게 스페인 버스는 꽤 많은 편의를 제공한다.
우선 좌석에 앉으면 눈 앞에 터치스크린이 있다. 이것저것 눌러보니 음악을 들을수도 있고 영화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일회용 이어폰까지 제공한다. 버스 안에서 와이파이가 잡히는건 기본이다.
뿐만 아니라 터치 스크린을 통해 인터넷 검색도 가능해서 한국 웹페이지 접속까지 된다(!) 그리고 스페인의 버스는 굉장히 높다.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는데 알고보니 버스 내부에 화장실도 있다. 그야말로 문화충격. 자리를 잡고 앉아 미리 사온 음료수를 마시며 "비긴 어게인"영화를 트니 여기가 버스인지 비행기인지.
약 한시간 반을 이동해 루고에 도착했다. 지난번 팔렌시아에 갔을 때처럼 도시를 구경할까 했으나 빨리 사리아로 넘어가고픈 마음에 곧바로 다음 버스를 예매했다. 이제서야 조금씩 걷는 법을 몸으로 익히고, 재미를 느껴가는 시점에 내 안에 붙은 불씨를 꺼뜨리기 싫었다.
터미널에서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누가 봐도 한국인인 사람 한 명이 있었다. 다가가서 말을 걸어보고 싶었는데 웬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까미노 길에는 예상했었지만 한국인이 꽤 많다. 계속 일정이 엇갈려 정들만하면 헤어지는게 아쉬울 따름이지만. 타지에서 모국어를 하는 사람을 만나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루고에서 사리아까지는 20여분 정도 걸렸다. 여기부터 산티아고까지는 약 100km 정도 거리인데 이 곳부터 순례자가 급속도로 많아진다. 100km를 걸으면 순례자 증서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나왔던 길에 비해 단체들도 많고 좀 더 어린 연령층들도 눈에 많이 띈다.
묵어가는 순례자가 많은 동네이기 때문에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을까 노심초사했는데, 내가 선택한 알베르게는 지나치게 사람이 없었다. 12인실을 배정받았는데 결국 나 혼자 그 큰 방을 썼을 정도. 알고보니 지난주 까지만해도 이탈리아의 휴가기간이라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그 기간이 끝나 이정도의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근처 마트에 가서 내일 아침에 먹을 거리를 간단히 사고, 혼자 창가에 앉아 맥주 한캔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제는 첫 주와 달리 내일 더 잘 걷고싶은 마음이 생긴다. 사리아부터는 내 발로 산티아고를 밟을 수 있기를 기원하며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