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여행은 일상처럼, 일상은 여행처럼

by 신아영

여행지에서 세우는 다짐이란 얼마나 쓸모없어지기 쉬운 말들인가.

스페인에서 걸으며 돌아가면 내 주위 사람들에게 잘 해야지, 엄마한테 좀 더 살갑게 대해야지, 꼭 운동을 시작해야지, 수영을 배워야지, 숱한 다짐을 마음에 새겼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후 근사하게 산티아고 여행기 마무리를 하겠노라고 다짐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빠르게 일상에 젖어들었다.


스페인에서 외로움을 타며 그토록 그리워하던 친구들과의 약속을 잡으며 또 다시 약속의 홍수에 허우적댔고, 정말 맛있게 먹겠노라 다짐했던 한국 음식들 리스트를 하나씩 클리어하니 맛없다고 투덜대던 순례자메뉴들이 급작스럽게 그리워지곤 하는 것이다.



내가 산티아고에 다녀온 것조차 잊어버리고 살 때쯤, 우연한 기회로 노원정보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인문학토크 "휴먼북"에 참여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걸으면서 보았던 풍경들, 먹었던 음식들,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해주면 된다고 했다. 일을 쉬고 있고 재미있어보이는 기회라 덥석 수락한 후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몰라 찍어놓았던 사진들을 훑어보다가 문득 감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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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이 길을 걸었던게 맞았구나. 사진과 글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물밀듯 쏟아진다. 기록은 어떤 형태일지라도 힘이 있다. 와이파이 잡기조차 열악했던 알베르게 침대 위에서 작은 핸드폰 자판을 두들기며 감상을 기록했던게 지금은 내 추억거리의 큰 덩어리로 남아있다. 사람이 참 간사한 것이 이제는 인터넷 환경도 빵빵하고, 쾌적한 맥북도 쓸 수 있는데도 글을 쓸 엄두를 내지 않았다. 사람을 움직이는건 환경이 아니라 마음가짐임을 새삼 또 깨닫는다.


간단히 사진들을 추려 9/27일 노원정보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인문학 토크 행사에 게스트로 참여했다.

급하게 준비했고, 별다른 PPT 자료도 없이 사진만 띄워놓고 말하는 형태였는데 정말 하고싶은 말이 많았구나 싶을 정도로 이야기 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다행히 참여하신 분들이 관심을 갖고 질문도 많이 해주셔서 성공적으로 행사는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산티아고 길에서 만났던 보라언니를 강남역에서 다시 만났다.

매일 땀에 쩔어있는 모습을 보이다 사람처럼(?) 하고 만나니 서로 얼굴을 보자마자 얼마나 웃었던지. 보라언니, 동진이는 산티아고에서 순례길의 마지막 밤을 함께 보냈던 소중한 인연이다.


IMG_9753.jpg 숙소에서 바라보았던 야경
IMG_9744.jpg 고기고기 노래를 부르던 우리는 기어코 마지막날 미션을 클리어했더랬지.
IMG_9752.JPG 치즈와 쵸리쏘, 샹그리아를 곁들였던 마지막 밤

맛있는 음식과 좋은 사람들, 끊이지 않는 이야기들로 나의 산티아고에서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마무리 됐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바르셀로나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기위해 새벽에 조심스럽게 둘이 깨지 않게 먼저 나오는 바람에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사실은 마지막, 이라는 인사를 나누고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인사하고 보내버리면 다시는 못 볼것 같아서. 우리는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은 채로 헤어졌고 다시 만났다.



"가서 무슨 생각했어?"

여행을 다녀온 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말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순례길에서 생각을 많이 했다기보단 여지껏 내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을 느꼈다. 외로워서 울어본 적도 처음이고, 이름모를 사람들의 친절함이 존재할 수 있음에 감동했다. 언어의 한계를 몸으로 느꼈고 체력을 더 길러야겠다 제대로 마음먹기도 했다. 내게 있어 산티아고 순례길은 체험과 확장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거기서 얻은 깨달음으로 나의 삶이 변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여전히 부끄러운 삶을 사는 중이다.


삼십여년 가까이 유지해오던 게으름이라는 관성이 한 달 여행으로 깨질리가 없기 때문에 내 인생이 극적으로 변했다고 말하기는 부끄럽다. 여전히 나는 매일 운동하기보단 친구들과 떠들고 술마시는게 즐거운 사람이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공부를 하자던 다짐들도 우선순위에서 여전히 멀리 있는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약하게나마 운동을 평생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수영 강좌를 등록했고, 삶의 기록도 열심히 해내려고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결국 산티아고 순례길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나는 종종, 자주 떠올린다.


여행을 떠나기 전 돌아와서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었으면 한다는 소망을 품었었다. 그러나 여행은 정말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결국 내 일상의 연속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이제는 여행같은 일상, 일상같은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여행을 떠나던 설렘으로 매일의 일상을 채워가고 여행을 떠나서는 그 도시의 일상을 살아낼 수 있기를. 앞으로도 그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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