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말을 걸다
눈 덮인 백담사는 풍경만으로 휴식을 주는 곳이었다. 시끌벅적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자연에 심취했다. 사실 핸드폰을 제출할때만 해도 알수없는 불안감에 휩싸였지만 모든 걱정근심을 자연 풍경과 맑은 공기가 치유해주었다.
오랜만에 밤 열시가 되기 전 잠자리에 들었고, 낯선 잠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꽤 단잠을 잤다. 새벽 다섯시 반에 일어나 아침 공양을 먹으러 가는데, 하늘의 수많은 별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한참을 넋잃고 바라보고 또 봤다. 하늘은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 최고의 예술작품임에 틀림없다.
둘째날의 첫 프로그램은 '다도'였다. 일상에선 차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을 뿐더러 보통은 일회용 컵에 티백으로 대충 우린 차를 접하기에 약간은 생경한 풍경이었다. 끓는 물을 숙우에 담아 2~3분 두면 차 우리기에 좋은 70~80도 정도로 온도가 맞춰지고, 찻잎을 다관에 넣은 후 숙우의 물을 다관에 천천히 부으면 차가 우러나기 시작한다.
뜨거운 물을 곧바로 찻잎에 붓는게 아니라, 한 김 식히는 과정부터가 다도의 시작이었다. 적당히 식었는지 올라오는 김 위에 손바닥을 대보며 마음을 함께 가라앉히고, 찻잎이 다관에 떨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기도 한다. 물은 따르는 속도에 따라 사기그릇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달라진다. 가장 신기했던건 처음 우린 차와, 그 다음번 우린 차의 맛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 급하게 후루룩 마시는게 아니라 호흡을 가다듬고, 차의 맛을 입 안의 모든 세포를 사용해 느껴보려 노력하니 티끌만큼 다른 맛의 차이가 느껴지는게 신기했다.
다도는 단순히 차를 마시는 예절이 아니라, 느리고 천천히 갈때 얻을 수 있는 삶의 감각에 대해 말해주고 있었다. 시간에 쫓겨 공복만을 해결하려 허겁지겁 때우는 끼니, 피곤한 몸을 깨우기 위해 그야말로 들이붓는 커피. 본연의 맛과 향이 무언지도 모르고 지나쳐버렸던 수많은 음식들.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동시에 게임을 하고 사람들과 카톡을 하고 업무 메일도 쓰느라 정작 창 밖의 풍경에 눈 둘 틈 없었던 일상들. 빠르게 많은 일을 처리하는 것을 능력으로 평가하는 이 사회에서, 그래도 하루 오분 정도는 천천히 숨을 쉬어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백담사 템플스테이의 마지막 프로그램은 '나'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이었다. 배를 깔고 누워 펜을 잡으니 눈앞의 종이가 막막하게 느껴진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나라는 존재 자체에 관심을 갖고, 말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는걸 깨닫고는 '나'에게 미안해졌다.
미안한 감정을 담아 첫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나'를 객체화하여 말을 거는것은 쉽지 않았다. 누군가가 보면 '오글거린다'고 표현할법한 행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오글거리는 행동이 주는 울림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간 자세히 관찰하지 못했던 나의 감정들이 결결이 살아 움직이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각자가 자신에게 쓴 편지를 낭독하고, 하루 오분씩이라도 '나'에게 말을 걸어보자고 스님과 약속했다.
조금 유치해 보일지 몰라도,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한 백담사 템플스테이. 다른 방해되는 것들을 내려놓고 나를 들여다볼 수 있었으니 이 자체로 가장 빛나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