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다.
여행온 후 모든 일이 다 잘풀려서 운이 좋다고 생각하던 중 오늘은 드디어(?) 일정이 꼬여버렸다. 아침 7시 45분 Saint-jean-pied-de-port 행 기차를 탔어야 하는데 이를 눈 앞에서 놓치고 지금은 다음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사연은 이렇다.
원래 여섯시쯤 민박에서 일어나 여유롭게 아침을 먹고 나오려던 나는 무려 일곱시에 눈을 떴다. 왜 여섯시에 맞추어놓은 알람은 울리지 않았던 거지. 민박집에서 빵 몇개를 챙겨 후다닥 뛰어나왔다.
이제 오는 버스만 타면 늦진 않겠다 싶었는데, 문득 이 방향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이게 바욘 기차역으로 가는 방향이던가? 비아리츠 해변으로 가는 것 같은데. 고심끝에 길을 건너 반대편 버스를 탔는데 타자마자 깨달았다. 원래 서있던 방향이 맞다는걸..!
급히 차를 세워 다시 내렸지만 이미 내가 타야했던 버스는 유유히 떠나고 있었다. 아.. 역시 처음 선택이 옳았다.
바욘 기차역에 도착하니 남은 시각은 2분. 기차는 어서 나를 타라며 내 눈앞에 떡하니 있었다. 빨리 기차표를 끊어야 생장까지 가는, 저 눈앞에 있는 기차를 탈 수 있다.
그런데 내 눈앞의 예비 순례자들로 보이는 일행들은 너무나도 유유자적하게 떠들면서 자동발매기 앞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했다. 빨리 빨리 가야 오늘 예정해둔 피레네산맥 넘기 코스를 완주할텐데.
자동발매기 앞 줄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고 결국 기차는 나를 떠났다. 아침에 일찍 눈을 떴다면, 버스를 잘못 타지 않았다면, 외국인들이 좀 더 빠르게 표를 끊었다면. 아니 어제 생장으로 가는 기차표를 미리 예매해뒀더라면 지금 이시각 나는 생장으로 가고 있었겠지.
나는 원래 조급해하는 성격이 아닌데도 이번만큼은 최대한 빨리 생장에서 출발하고 싶었기 때문에 마음이 불안했다. 하루에 피레네 산맥을 넘는다는게 엄청나게 힘들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인지 엄청난 압박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일정은 꼬여버렸고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이 상황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루에 주어진 일정을 다 소화하지 못해도, 계획한 일이 꼬여버려도 괜찮다. 덕분에 기차역 안에서 마음도 정돈하고 순례길 정보도 알아보며 비로소 여행자의 신분을 씻어내는 중이다.
이제 다시 생장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