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그리움에 대한 기억
그는 제대로 된 휴가를 간 적이 없었다. 일에 치여서 휴가를 낼 짬이 없었다는 식의 이유가 아니었다. 휴가 기간에 울진에 있는 그의 본가에 가서 그의 어머니, 즉 나의 할머니를 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곳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친화적인 곳이었다. 온수를 쓰기 위해서는 물을 직접 끓여야 했고, 물이 전혀 사용되지 않는 완전한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는 그런 곳이었다. 당연히 집안 곳곳이 고장 나기 일쑤여서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휴가 시즌이라고 부르는 시기에 항상 울진에 내려가서 낡은 집을 수리하고, 각종 불편 사항을 들어주곤 했다. 그건 결코 휴가라 부를 수 없는 고난의 여정이었다.
가서도 고생이지만 거기까지 가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그의 본가는 큰 터널 하나가 뚫리기 전까지 무려 편도 8시간이 걸리는 곳이었으며, 다른 식구들 모두 심한 멀미를 달고 살아서 운전하는 그를 가만 내버려 두지 못했던 탓이다. 이에 대한 그의 대책은 아주 이른 새벽에 출발하는 것이었다. 나머지 가족들을 모두 재운 채로 엑셀을 열심히 밟으면 멀미는 피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도착하면 어느새 아침 7,8시가 되어 할머니가 반가운 목소리로 보고 싶던 아들을 맞이하였고, 그는 장시간의 운전에 지친 몸을 이끌고 여전히 이른 아침부터 할머니의 이런저런 아쉬운 소리에 박자 맞춰 중노동을 시작해야 했다. 그래도 그는 군소리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아들이 멀미하느라 카시트를 엉망으로 만들어도, 밭일을 하다가 온몸이 벌겋게 타서 따가울 정도가 되어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우리가 그걸 휴가라고 부름으로써 그를 응원했다. 적절한 시기가 되면 울진에 가서 놀다가 그가 노동하는 것을 아주 조금 돕는 것.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우리의 휴가였다. 어느 누구도 해외나 제주도 따위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우리는 대신 울진의 쏟아질 듯한 은하수에 대해 이야기했고,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오징어회를 초장에 비벼먹고 싶다 했으며, 온천에 가서 오랜만에 때를 좀 벗기자고 작정하곤 했다.
그런 우리의 휴가는 내가 성인이 될 때쯤 끝나버렸다. 그에게 울진에 갈 기름값도, 오징어회를 사줄 돈도 남아있지 않을 때였다. 작은 삼촌이 가끔 직접 그를 차에 태워 울진에 내려갔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울진에 갈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어쩌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께서는 고령의 연세에 컨디션이 급격히 안 좋아져 서울에 있는 요양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는 나에게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염치없는 이야기지만, 그가 그리 얘기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참석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낮에는 학교 수업을 들어야 했고, 밤에는 학원에 가서 일을 했다. 그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상을 치르고 나서 그는 처음으로 나를 나무랐다. 장례식에 와서 고생하고 갔던 나의 사촌들의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서운함을 토로했다. 나는 아무 대꾸 없이 그가 내뱉는 모든 단어를 주워 담은 후에 침대에 누워 아침을 기다렸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러 나는 그의 흔적을 조그마한 나무 밑에 남겼다. 생전의 그가 원하던 바였다. 나는 그새 충분한 기름값과 여윳돈을 가진 꽤 그럴듯한 어른이 되었지만, 단 한 번의 휴가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보고 싶다. 그때의 그도 아주 많이, 그랬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