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휘 Mar 20. 2016

더 깊이 이해하면, 좀 더 나아질까

비참할 땐 스피노자 | 발티자르 토마스


스피노자라는 이름을 알았다. 내일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로 그를 기억했다. (사실은 마틴 루터의 말이라는 설이있고, 또 마틴 루터의 말이 아니라고도 하고 여튼 스피노자의 말은 아닌게 확실하다.) 그의 사상이나 철학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리고 스피노자를 나에게 읽어보라고 권한 사람도 없었다.


스피노자에 관심이 생긴 건, 신형철이 인용했던 바로 문장 때문이었다.

<에티가> 3부의 '정리 41'과 '주석'을 (편의상) 합쳐 정리하면 이렇다.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상상하고, 또 그가 자신이 그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만한 타당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믿는다면, 그는 자부심을 느끼며 기뻐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상상하되, 그가 그 사랑에 어떤 원인도 제공한 바가 없다고 믿는 경우, 그는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그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다."(Ethics, Penguin, 1996, p. 92) 

-신형철|정확한 사랑의 실험|18p 

인용문이 마음에 들어서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인용하기 전 신형철이 한 말이 나에게 자극적이었다. "신선한 인용은 되지 못하겠지만," 아 난 신선하지 않은 문장을 신선하게 느끼고 있었다.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에티카를 본격적으로 읽어보자 마음 먹은 건,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에티카는 감정을 다룬 3부부터 읽었다. 난 에티카를 세상의 질서를 규명하려는 철학서로 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서 읽었던 것 같다. 내가 매료된 3부의 정리41이 그러하듯. 이 책, <비참할 땐 스피노자>를 펴든건 정리 몇을 읽을 때 쯤이었다. <비참할 땐 스피노자>는 내 필요에 맞는 책이었다.  이 책은 철학을 개인의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게 읽어보자는 기획에서 나왔다.


맞다. 사실 난 더 개인적인 이유로 이 책을 빼들었다. 내 내면은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좋은 선택인지도 몰랐고, 또 몰랐다.

다시 말해 결정한다는 것은 선택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선택에는 의지가 필요 없다. 어떤 선택은 주체의 자발적 의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 정보의 결과를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택은 반성의 결과가 아니라 인식에 기반을 둔 것이며 우리의 자유는 의지가 아니라 인식에 기반을 두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에 대한 인식이 필연적으로 그 선택지로 우리를 인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티자르에 따르면,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자유 의지라는 것은 무력하다. 우리는 무엇을 쫓아야 하는가. 우리의 욕망을 따라야한다. 우리를 더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쪽으로 움직여야한다.

 

에티카는 정의와 정리와 주해로 이어지는 구조로 되어있다. 기하학책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앞의 정리와 정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뒤에 나오는 것들을 이해하기 힘들고, 또 그것들을 연결해서 사유하는 것도 쉽지않다. 이 책은 삶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질문들-예를 들어 선택과 의지, 필연성에 관한-을 중심으로 정리가 되어있고 또 우리에게 생각해볼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그래서  에티카를 직접 읽을 때보다 에티카에 대한 이해를 풍성하게 해줄 수 있고 에티카라는 텍스트를 계속 흥미롭게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에티카를 처음 읽으려고 한다면 좋은 선택이다. 얇다. 번역도 읽기에 편하다.


그래서 나에게 도움이 되었나. 그렇다. 그러나 여전히 슬프다. 나의 어떠함에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나 깊어진 이해만큼 더 기뻤고 더 슬퍼졌다. 책을 읽고 생각하고 깨달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나의 한계와 계속 마주하는 일을 다시 느낀다. 그래도 좀 더 낯선 곳으로 나아간 느낌이라 만족했다. 뭐 책이 이정도 해줬으면 됐다.

매거진의 이전글 난 아직도 소설을 읽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