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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휘 Mar 23. 2016

시련이 혹독할수록,  관객은 재미있다

영화 <주토피아>


 디즈니에서 제작한 주토피아가 흥행하고 있다. 여러 번 관람한 성인 관람객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봄방학이 끝날 때쯤 개봉해서, 여러 영화들을 상대로 꾸준히 3-4위를 유지하더니 280만을 넘어섰다. 이는 미니언즈보다 좋은 성적이고, 빅 히어로의 성적(280만)을 최근에 넘어섰다. 영상미도 뛰어나고, 연출도 좋다. 이야기는 정교하고 만듦새가 좋다.



 맹수가 초식동물을 사냥하고 쫓았던 때를 기억하는 동물들은 이제 없다. 모두가 어우러져서 이성적으로 대화하고 사회를 이루면서 살아간다. 주인공 주디 홉스(토끼)는 어렸을 때부터 경찰관이 꿈이었다. 하지만 토끼 경찰관은 없었다며 모두가 걱정하지만 경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다. 주디는 동물들이 모두 어우러져 살아가는 대도시 주토피아에 배치된다. 하지만 동료들은 덩치도 작고, 힘도 없어 보이는 그녀에게  "맹수 실종 사건"을 도울 기회를 주지 않는다. 주차요원으로 활약하던 주디는, 우연한 기회에 한 족제비 실종 사건을 경찰서장에게 48시간 이내에 해결하지 못하면 그만둔다는 다짐을 하고 맡는다. 족제비가 실종되었을 당시, 그에게 아이스크림을 팔았던 닉 와일드(여우)를 반협박으로 함께 수사에 끌어들인다.


 우선 영화 <몬스터 대학>이 떠올랐다. 주인공은 어렸을 적부터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무시당한다. 그러나 시련을 거쳐서 결국 인정받는다. 어느 한쪽은 늘 자신에 대한 편견을 지고 살아간다. 불가능 해 보이는 꿈을 꾸고, 그 때문에 시련을 겪는 서사는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를 비롯한 반신들이 자의든 타의든 겪어야 했던 시련들과 닮아있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은 결국 살아남아 받아들여진 자들만 등장하지만 말이다.


 주디가 어쩌면 경찰관을 꿈꾸는 것은 왜일까. 자신이 가진 재능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을 굳이 하려는 것은 왜일까. 이 부분이 명확하게 드러나진 않는다. 다만, 주토피아에 대한 판타지가 어렸을 적부터 있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주디는, 토끼들의 가업인 농장일에서 벗어나, 주토피아에 가고 싶었고, 그곳에서 필요한 경찰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시골 소녀가 대도시로 상경해서 그곳의 냉정과 무관심에 치이다, 그곳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구조로 볼 수도 있다.

 

 꿈-좌절-극복이든 시골-도시의 시련- 도시의 주류든, 이런 플롯을 가진 이야기가 성공하는데 핵심은 시련이다. 시련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가, 얼마나 혹독한가에 따라서 관객이 느끼는 카타르시스의 양이 정해진다. 당연히 좌절이 설득력이 있고, 혹독할수록 주인공이 극복한 뒤에 관객이 느끼는 감동은 크다.


이야기가 성공하는데 핵심은 시련이다.

혹독할수록 느끼는 감동은 커진다.


 주토피아에서 주디와 닉이 겪는 시련은 혹독한가, 그렇다. 하지만 빅 히어로에서처럼 세계가 멸망할 것 같은 시련은 아니다. 실패하면 경찰을 그만두거나, 다시 아이스크림 장수로 돌아가면 되는 정도다. (뒤에 가면 그 시련의 의미가 주토피아 전체로 확장되지만) 그럼에도 관객들이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시련의 적당함이 현실과 이야기를 밀착시키기 때문이다. 주디가 겪는 무시와 설움은 닉이 겪는 편견은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일들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이 거리감 덕택에  패러디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다. 패러디라는 것은, 서사 밖을 관객에게 인식하게 한다. 관객이 패러디를 보면서도 극의 집중력을 흩트리지 않는 건 이미 스크린에서 현실을 순간순간 느끼기 때문일 거다.


젊은 세대는 패기가 없다.
젊은 세대는 도전정신이 부족하다.
젊은 세대가 겪는 시련은 이유가 있고,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
힘들수록 더 노력해야 한다.


 이런 얘기들은 2007년 이후로 보이던 세대론이었는데 한동안 보이지 않다, 요즘 자주 본다. 삼포 혹은 칠포 세대라 불리는 젊은 세대에게 사회 구조의 부당함을 말하며 위로를 전하기보다, "시련"과 "노력"을 말하는 사람들(많다, 정말.)을 보면서 이들은 젊은 세대의 삶을 멀리서 흥미로운 "이야기(거리)"로만 소비하는구나 느낀다.  관객석에서 보면,  시련은 혹독할수록, 그 시련 속에서 버둥 댈수록 이야기는 즐거워지니까.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자신도 관객석이 아니라 헬조선이라는 이야기 안에 있는 걸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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