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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휘 Mar 18. 2016

성장은 살인이다

영화 <블루 재스민>, <할람 포>

성장은 살인이다.
-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블루 재스민>과  <할람 포>를 연달아 봤다. 이 두 작품을 엮어서 볼 생각이 아니었다. 그저 어쩌다 보니 보게된 영화들이었고, 순서였다.  

<블루 재스민>은 뉴욕에서 상류층의 삶을 살다가, 남편의 부정으로 모든 것을 잃은 여자가 여동생이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오면서 겪는 일들이다. 그녀는 성인이 된 이후로, 무언가를 위해 노력해본 적이 없고, 대학교도 졸업하지 않고 남편과 결혼했다. 남편이 제공하는 부를 누리면서 원하는 것들을 가지고 살았다. 그와 반면에 그의 여동생은 변변치 않은 남편을 만나, 뭘하든 한껏 노력해야하는 삶을 살았었다. 여동생도 남편과 갈라섰다. 주인공인 '재스민'은 이제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한다.  

할람은 어머니를 잃었다. 자기만의 공간에서 그녀를 그리워한다. 그후로 누군가들을 훔쳐본다. 새엄마와 아버지를 훔쳐보기도 하고, 같은 또래의 섹스 장면을 훔쳐보다 훼방 놓기도 한다. 할람은 엄마의 죽음이 새엄마 때문이라고 믿는다. 할람은 새엄마에 대해서 원망과 동시에 욕망도 느낀다. 새엄마와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해 할람은 런던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엄마와 똑 닮은 여자를 만난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이성을 잃었다. 더 정확히는 사랑했던 이를 잃었다. 할람에게 어머니는 모성이자, 욕망의 대상이었던듯 보인다. 그녀를 잃고, 그녀의 자리를 차지한 새엄마에게 느끼는 욕망은 엄마에 대한 욕망이 전이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가 떠오른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노골적으로 끌어온다. 그가 런던에서 만나 한눈에 빠진 여자가 엄마와 똑닮았고, 그녀가 할람을 자상하게 챙기고 또 유부남과의 관계를 가진다는 점에서 그녀는 명확하게 할람의 엄마이다. 그와 동시에 아버지의 모습이 그녀에게도 겹친다.


할람은 어머니의 죽음을 계속 부정한다.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증거와 증언들이 보이지만 그것을 애써무시한다. 할람은 이제 자신이 엄마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성장은, 엄마 없이도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일어난다. 던져졌지만, 그래도 살아내고 있다는 느낌은 할람이 엄마를 닮은 케이트와 섹스를 하고 난 후 친밀감을 느낀 후이다. 하지만 결국 다시 엄마의 죽음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으로 돌아온다. 이 모습이 끝나는 것은 또 다른 따뜻한 엄마(케이트)를 찾는 게 아니라, 자신이 욕망했던 엄마(새엄마로 표상되는)까지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는 결국 새엄마를 몰래 끌어내어 자신의 엄마가 죽었던 방식대로 손을 묵고 입을 막은 채로 물에 던져버린다. 새엄마를 다시 건져내고, 자신의 엄마는 자살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다.


이 서사는 노골적으로 프로이트에 기대고 있다. 할람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에서 처음 등장할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곳에서 일을 벌일 때 늑대 머리 가죽을 쓰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프로이트는 늑대에 관한 책을 썼다.). 성장은 내 안의 (슈퍼에고)아버지와 맞서고,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일이다. 그래서 내면의 균형을 잡아내며 자신의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블루 재스민>은 어떠한가. 이 중년의 여자는 한번도 자신이 그 어떤 것에 대해 책임져 본 적이없다. 돈이 없다면서, 루이비통 가방 여럿을 들고 1등석을 탄다. 그저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책임져 주기를 바라고 수렁에서 건져내주길 바란다.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든 해결이 되어있을 거라 생각하며 문제를 회피한다. 언제나 수동적인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것을 충분했다.


사실 재스민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에 영향력을 준 적이있다. 그리고 지금 그 대가를 치루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대가를 치룰지 생각하지 못했다. 순간의 분노로 내린 결정에 그녀는 그녀가 누린 모든 것을 잃었다. 남편은 잡혀들어갔고, 아들은 떠났다. 그럼에도 다시 그런 삶을 얻을 수 있으리라 꿈꿨지만 또 자신의 거짓말 때문에 그에게서 멀어진다.


난 이영화가 "결국에는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내어야 한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이 영화는 "우리는 잘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한다. 재스민 뿐아니라 이 곳의 그 누구도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부유했다가 가난해지기도 하고, 하버드 생이었다가 길거리 악사가 되기도 하지만 살아왔던 태도를 바꾸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다. 재스민의 남편은 자신의 처지가 바뀌어 그 전과 같은 태도로 살아가지 못하자 자살을 선택한다.


이 두영화는 자신이 살아왔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에 대해 묻고 있다. 한쪽은 "그럴지도?"라고 답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아마 안될걸?" 이라 답한다. 어느쪽이 더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뒷쪽의 답이 진실에 가깝다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럴지도"라는 답을 믿기로 노력한다. 그것은, 이 태도가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힘을 언젠가 한번쯤은 주기 때문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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