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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휘 Nov 05. 2017

봐줄 만한 나름으로 시를 쓰지

신철규, 이수명

지난주부터 시를 읽었다. 한 달 만이었다. 다른 할 일이 있었고 시집을 펼치지 못했다. 신철규의 시집을 한 달 전에 샀고 1부까지 보다 지난주에 다시 펼쳤다. 생각보다 잘 읽히지 않아서 천천히 더디게 읽어나갔다. 읽다 멈추다를 반복했고 신철규 읽기의 휴지기에, 새롭게 펼친 이수명의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를 먼저 다 읽었다. 그리고 오늘 신철규의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를 다 읽었다. 둘은 참 다르다.


  지구 속은 눈물로 가득 차 있다

  

  타워팰리스 근처 빈민촌에 사는 아이들의 인터뷰

  반에서 유일하게 생일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아이는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타워팰리스 근처를 둘러싸고 있는 낮은 무허가 건물들

  초대받지 못한 자들의 식탁


  -신철규, 슬픔의 자전 중에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신철규, 유빙 중에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신철규는 인간적인 정념들을 이미지에 기대어서 새롭게 하거나 깊게 들여다본다. 지구 속의 슬픔은 타워팰리스 근처 빈민촌 소년의 슬픔이 되고 초대받지 못한 자들의 식탁으로 구체화된다. 최초의 입맞춤은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는 것으로도 못 미치는 것으로 드러낸다. 신철규의 시는 결국 사람의 정념, 구 중에서도 슬픔을 향한다. 다양한 슬픔에 도달한 시는 마침내 마침내 슬픔을 드러내는데, 드러낸 후에 희망의 말이나 혹은 상황을 다른 게 바라보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희망이, 그리고 슬픔을 전유한 후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신철규의 화자는 슬픔을 게워낼 뿐이다.


신철규는 슬픔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 같다. 슬픈 화자가 세상을 다시 조립한다. '지구 속은 눈물로 가득 차있다.' 이 별의 우리는 슬픈 존재들이다. 지구는 슬픔의 물리 법칙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법칙이기에 쉽게 바뀌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슬픔의 물리를 지닌 지구를 말하는, 화자는 쉽게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 물리는 오랫동안 바뀌지 않을 것이므로 옆에서 함께 견딜 것이다. 같이 같은 것을 견뎌왔다는 위로. 그것은 힘이 세다.



  물건은 묶여 있다. 나는 줄을 풀고 있다. 누군가 포장된 도로 위를 달린다.

  -이수명, 포장품 중에서,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비 오는 날이면 나는 벽돌을 쌓는다.

  한 장 한 장

  눈먼 벽돌들

  잠자는 벽돌들을

  끝없이 높이 쌓는다.

  -이수명, 벽돌 쌓기 중에서,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이수명은 신철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를 쓴다. 화자의 정념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 혹은 이미지가 선언됨으로 시작한다. 그 후에도 그 상황이 화자를 통과하지 않고 바뀌거나 심화된다. 선언되는 이미지는 일상의 외부에 있다. 일상이라는 정돈된 그리고 어느 정도 규칙이 있는 세계를 벗어나 있다. 그러나 이수명의 시는 일상 세계와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지는 않다. 적어도 이 시집에서는 그렇다. '고양이'는 고양이이고, '벽돌'은 벽돌이다. 다른 것을 빗대어 말하거나 바꾸어 말한 것이 아니다. 다만 시어들의 움직임과 이미지가 일상과 다를 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일상을 선명하게 만든다. 

일상은 우리의 시선이고, 우리의 규칙이다. 우리는 언어의 논리 속에서 생각하고 언어의 한계 안에서 삶을 살아낸다. 이수명은 우리에게 낯선 이미지와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일상을 낯설게 만들고 선명하게 만든다. 하지만 통상적인 낯설게 하기의 방식과는 다르다. 통상적인 낯설게 하기는 일상의 법칙과 일상의 이미지들을 다른 이미지로 겹쳐서 낯설게 하는 것이라면 이수명은 일상의 '것'들을 일상의 '이미지'에서 건져내어서 새로운 방식으로 움직이게 하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들여다본다. 이수명이 낯설게 하는 일상은 우리가 인식하는 일상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우리의 인식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의 일상이다.

그럼에도 이 시집은 다른 전작 시집들 보다는 일상에 가깝고 덜 탈주해있다.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라는 시집의 이런 온도를 잘 보여주는 시가 바로 다음의 시일 것이다.


    


  복도 끝에 너는 서 있다.


  너에게 가려고

  가지 않으려고

  나는 허리를 구부렸다.


  그때 피어난 바닥의 꽃을 향해

  그때 숨어든 꽃의 그림자를 향해

  허리를 구부렸다.


  구부러진 채

  나는 펴지지 않았다.


  복도를 떠돌던

  나의 빛은 구부러진 채

  나의 나날들은 구부러진 채

  펴지지 않았다.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그때 흔들린 꽃에 대해

  그때 사라진 꽃의 그림자에 대해


  나는 말하지 않았다.

  너에게 가려고

  가지 않으려고


  구부러진 채


 - 이수명, 나를 구부렸다 전문,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이 시는 특이하게도 화자의 의도를 드러낸다. '너에게 가려고 / 너에게 가지 않으려고' 하지만 나의 허리는 펴지지 않았다. 허리를 구부렸을 때 복도 바닥에 피어난 꽃과 그 꽃의 그림자를 향해 허리를 여전히 구부리고 있을 뿐이며, 그것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너와 나 사이에는 '복도'가 있다. 너와 나 사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계속 그곳을 향해 허리를 구부리게 한다. 나를 통과하지 못한 빛들의 꼴은 나를 너에게 가려하게도, 가지 않게 하게도 한다. 그래서 나는 구부러진 채로 있는다. 이 시의 애절함은 화자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더욱 애절하지만 질척이지는 않는다. 난 이 습도와 온도가 좋다.


신철규와 이수명이 다른 방식으로 시를 쓰고 도달하고 싶어 하는 곳도 다른 것처럼 시인들 수만큼의 시론이 있고, 시인들의 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무엇이 시인지,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그래서 어쩌면 시인들은 좋은 시를 쓰는 것보다 좋은 시인이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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