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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휘 Jan 06. 2018

좋지만 슬픈 독후의 감

시집 <책기둥> 에 대한 유감  몇

오늘 김수영문학상을 받은 시집 책기둥을 사서 읽었다. 문보영 시인의 시는 능청스러우나 끈적이지 않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런 시의 질감을 시집 뒤에 붙은 해설은 명랑하다고 부르는데 명랑하다는 말이 주로 자신보다 어린 사람이나  미성년에게 혹은 소녀에게 활용되는 느낌이들어 적절한 지칭은 아닌 것같다. 나이 많은 남성이 이런시를 썼다면 명랑하다 했을까?

시의 온도와 리듬이 좋고 상상력은 적당하다. 적당하다는 것이 좀 좋다는 뜻이 아니라 좋아하는 온도로 정확하게 맞춰진 온수 같은 적당함이다.


그러나 표제작이자 마지막에 실린 책기둥이란 시에 유감이 있다. '서가에는 책만이 있다. 책은 기둥 모양으로 쌓여 있다. 그 주변을 난쟁이들이 서성인다.' 이 부분 이후로 난쟁이가 등장한다. 이 난쟁이들은 책기둥 주위에서 서성이고 책기둥을 무너뜨린다.

 

난 난쟁이를 그저 비유로 상징으로 끌어와서 쓴 것이 유감이다. 난쟁이를 판타지 세계의 키작은 종족에서 빌려왔을 수 있겠지만 그 종족도 왜소증으로 분류되는 이들에 대한 대상화이다. 난쟁이dwarf는 여러 문화권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작은 사람들을 공격적으로 대상화하는 말로 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쟁이 자체가 시어가 될 수 없는 말인가라고 묻는 다면 나는 시어가 될 수 있겠다고 말하겠지만 그 단어가 어떤식으로 쓰여야 비혐오적으로 시어가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덧 붙이겠다.

 

난 이 시에서 왜 책기둥을 맴도는 이들이 난쟁이가 되어야하는지 모르겠다. 시인이 왜 왜소한 사람들을 난쟁이라 불러야하는지도 그들의 어떤 특징에 기대 시어로 쓴건지도 모르겠다. 다만 추정한다면 그들을 인간과 다른 신비로운 무언가로 대상화한거라는 강력한 의심을 할 뿐이다.


이 문제가 시인만의 문제인가. 이건 민음사 편집부의 잘못이 더 크다. 이 시를 표제작으로 마지막에 실을 작품으로 결정하면서 문제점을 전혀 못 느낀건가? '로자' 나 '도미닉' , '에드몽' 같은 이국적인 시어 같은 정도로 생각한 건 아닌가? (사실 이에 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이국적인 이름들'을 쓰면서 백인들, 코카시안을 떠올리면서 썼을거라는 의심이 든다. 다른 인종으로 특정할 수 있는 이름이 안 보이기 때문인데 이건 더이상 근거가 없으니 넘어가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 문제도 생각해봐야한다.)


 시집 너무 좋다. 진짜 좋다. 그래서 이 실수를 고치는 개정판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난 내가 위에서 이해한 방식 외에 다른 방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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