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프랑스 코미디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시사회에 다녀왔다.
프랑스의 소도시에서 우울증 때문에 한동안 약을 먹으며 집에서만 생활해야 했던 베르트랑은 다시 입사 면접을 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러다 그는 수영장에 갔고 남자 싱크로나이즈 팀이 연습하는 광경을 본다. 베르트랑은 남자 싱크로나이즈 팀에 합류한다. 남자 싱크로나이즈 팀에는 한물간 락커, 불어를 전혀 하지 않는 흑인, 가족도 친구도 없이 살아가는 수영장 관리인, 언제나 불평불만인 로랑, 아무도 사지 않는 수영장을 파는 파산 직전의 사장 등이 있다. 여성 코치인 델핀이 그들을 가르친다. 팀은 어설프고, 연습은 제대로 되지 않는다. 베르트랑의 주변은, 그리고 그 도시, 수영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남자 싱크로나이즈와 그 팀에 호의적이지 않다. 그러다 수영장 관리인인 티에리가 노르웨이에서 열리는 국제 싱크로나이즈 대회 공고를 발견하게 된다.
수영장을 좋아한다. 그리고 싫어한다. 국공립 체육 센터에서 운영하는 수영 교실은 늘 접수 경쟁이 치열하다. 수영장 한편에 외부로 난 창이 있는 수영장을 좋아한다. 아침과 낮에 수영을 하면 그곳으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과 그 햇빛이 수면에 부서지고 그 부서진 빛을 머금은 물은 가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중에도 이 빛은 멈추지 않는다. 부지런히 킥을 하고 팔을 움직이다 잠시 멈춰 수영장 풍경에 눈을 빼앗길 때 늘 실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영장이 싫기도 하다. 수영장과 클래스에 따라 다르겠지만 늘 같이 수업을 듣던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을 때 텃세를 부리거나 혹은 자기들만의 규칙을 상대에게 동의 없이 강요하기도 한다. 자신들의 감정을 근거로 상대에게 돈을 요구하기도 한다. 회비를 모으길 원하고 그것으로 자신들만의 미아함과 도리를 해결하고, 호의를 베푼다. 모든 스포츠 클럽이 이러진 않지만 스포츠 클럽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래서 수영장을 좋아하고, 싫어한다.
코치였던 델피가 남자 싱크로나이즈를 쉽게 보거나 우습게 보는 걸 걱정하면서 베르트랑을 적당히 몰아세우지만 이 프랑스 남자 싱크로나이즈 팀은 그를 환영한다. 그리고 아주 빠르게 한 팀이 된다. 베르트랑이 다른 사람들이 지닌 남자 싱크로나이즈에 대한 편견 "게이 같음" "여성스러움" "우스꽝스럽다" 이 없다는 것은 이 서사를 베르트랑의 서사에서 남자 싱크로나이즈 팀의 서사로 빠르게 넘어갈 수 있도록 한다. 싱크로나이즈 팀의 서사는 빠르게 진행되고 이것은 미덕이다. 이 속도는 문제를 쉽게 만들고 그 문제를 뚫고 지나가게 한다. 이 영화의 특징은 문제를 극복하지 않고 통과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대로 있고, 그 문제를 지닌 채로 그저 통과한다. 돈이 부족하거나 교통편이 필요할 때 이들은 그들이 가진 자원으로 대응한다. 낡은 캠핑카를 모두 끼여 타고 먼길을 떠나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각 개인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각 개인은 그저 그 문제를 비교적 매끄럽게 통과한다.
하지만 서브플롯인, 각 멤버들의 서사는 진행이 더디고 중언부언에 가깝게 연출된다. 각 멤버들이 처한 상황, 우울증 가족들이 지지하지 않는 상황, 엄마와 딸과의 소원한 관계, 파산을 앞둔 사업 등은 계속해서 등장하는데 심화되거나 다양한 측면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라 동어 반복처럼 등장하고 사라진다. 더욱 아쉬웠던 점은 동어 반복으로 채우고 있는 분량으로 이 멤버들 주위에 있는 아이와 여성 캐릭터들에게 더 입체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 서사에는 여성 주조연도 등장하고, 여성 장애인도 등장하고, 외국 이민자 주조연도 등장한다. 그리고 수많은 여성 아이, 조연들이 있다. 이들이 공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여성 코치인 델피는 자신의 전사가 있다. 자신만의 서사가 이 영화 상에서 이어진다. 하지만 어느 정도 확보된 입체성은 전형적으로 구성된 입체성이다. 왜냐하면 이 곳에서 유일하게 입체성을 지닌 여성 캐릭터이기 때문에 최대한 보편적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보편성이란,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전형이라는 뜻이고 이 전형은 편견에서 비롯된다. (스포일러 때문에 말을 모호하게 하지만) 델피 외에는 어떠한가. 남자 싱크로나이즈 팀에는 흑인 외국 이민자 멤버가 있다. 그는 불어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멤버들은 그가 말을 하면 알아듣는다. 영화는 자막도 달지 않는다. 나는 이 설정과 장면을 보고 인종 차별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가 정확히 어떤 느낌으로 의도로 말을 하는지 더 이상 알아보려 하지 않고 대충의 의사소통 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캐릭터들 사이에서만 이런 것들이 통용된다면 모르겠지만, 영화는 자막조차 달지 않는다. 그리고 외국인 이민자에 대한 전형적인 시선으로 캐릭터를 빚어놓은 건 덤이다. 결국 그는 극이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철저히 물건화 된 채로 영화가 끝난다. 그는 무뚝뚝하고 성실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영화를 보면 착하게 빚어 놓고 무해한 느낌으로 빚어놓으면 차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어느 유럽 태생 백인의 수다를 듣고 있는 것 같아서 피곤했다.
코미디 영화일수록 이런 부분들이 중요하다. 웃음은 대부분 어떤 맥락을 전달하는 행위이다. 예를 들어 남자 싱크로나이즈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면 이 영화는 코미디 영화가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코미디 영화는 그 영화가 상정하는 혹은 제작된, 사회를 깊게 반영한다. 우리가 다른 문화권의 유머에 쉽게 웃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그리고 웃음을 만드는 쉬운 방법은 비웃는 것이다. 그나마 안전한 비웃음의 대상은 자신이고, 쉽게 실수하기 쉬운 대상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비웃음은 사회적 약자들을 더 궁지로 몰기도 한다. "웃자고 한 거야."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었어." "모두 웃고 있잖아." "네가 예민한 거야."에서부터 시작해서 "아니면 여기서 떠나."로 끝나는 말의 흐름이 이어진다. 심지어 이 영화는 중년 백인 남성들의 시건과 그들을 중심의 이야기다. 그랬다면 더욱 조심해야 했다.
이 영화가 어떤 편견을 이겨내고, 나름의 약자들이 사회 안에서 자신을 다시 세우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욱 아쉬웠다. 그리 도덕적이지도, 현명하지도 않은 중년 백인 남성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마음으로 다른 존재들도 바라봤으면 어땠을까 싶다. 알리바이 캐릭터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땅이 아닌 물에서, 그리고 머리를 하늘이 아니라 바닥으로 향한 채 움직이는 영화와 어울리는 것 같다. 상업 영화라도 충분히 할 수 있고, 상업 영화니까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레트로 한 조명과 연출, 클라이 막스의 짠함 때문에 즐겁다가도 마음 한편에 불편함과 짜증도 같이 몰려왔다. 프랑스에서 400만이나 이 영화를 관람했다고 한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영화를 관람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프랑스도 우리도 더 나아가야 할 지점이 있다는 건 분명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