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자기 Feb 08. 2022

세상에 필요 없는 소비는 없, 길 바라며

기록하는 2022년│Episode 9│2022.02.08

[오늘의 소비 요약]


- 산 것 : 책상 1개, 의자 1개, 발받침 1개, 무선 기계식 키보드 1개, 데스크매트 2개, 마우스패드 1개

- 총금액 : 541,700원

- 할부 개월 : 무이자 4개월

- 월 부담액 : 135,425원

 

작년 10월 이사했다. 나는 서재를 겸한 나만의 작업 공간을 꾸미고 싶었다.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우선 온전히 서재를 꾸미기에는 집 공간의 여유가 부족했다. 누군가 와서 이불이라도 깔고 잘 수 있는 공간이 먼저 필요했다. 방안 가득 책상과 책장으로 채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작은 방 한쪽 벽에는 손님용 이불장 하나와 아주 최소한의 책을 꽂을 수 있는 책장 하나를 뒀다. 컴퓨터만 겨우 올릴 수 있는 작은 책상도 하나 뒀다. 남편이 소중한 피아노도 나머지 한쪽 벽면에 세워뒀다. 그랬더니 작은 방은 오히려 아주 애매해졌다. 미칠 듯이 좁은 것은 아닌데 4면이 가득 채워져 있고, 가운데 바닥만 뻥 뚫린 듯 휑하다. 손님이 왔을 때 편하게 쉬거나 잘 수도 없는데, 우리라고 편하게 컴퓨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도 저도 아닌 그런 어떤 제3의 공간이 됐다.


물론 집에는 책상이 많다. 우선 거실에 소파 대신 8인용 테이블이 있다. 그 큰 테이블에서 우리는 밥도 먹고, 책도 읽는다. 종종 보드게임도 한다. 부엌에는 아일랜드 식탁도 있다. 약간 좁지만 나름대로 편한 그곳에서 우리는 역시나 밥도 먹고, 책도 읽는다. 종종 보드게임도 한다. 집에는 의자도 많다. 우선 8인용 테이블과 함께인 기본 의자 여섯 개가 있다. 아일랜드 식탁에 딸린 두 개의 바 의자, 그리고 빛을 받으면 영롱하게 빛나는 투명한 디자인 의자 한 개도 있다. 


그래서 서재가 필요하다는 것은 핑계다. 그것이 핑계라는 것은 사실 내가 제일 잘 안다. 그럼에도 변명거리는 많다. 집의 테이블이 너무 많은 것은 언제라도 무엇인가를 하기에 아주 적합한 동시에 공간의 분리가 잘 안 된다. 거실에서 밥도 먹고, 책도 읽고, 보드게임도 하다 보면 테이블은 점점 가득 찬다. 정신없어진다. 부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10개 가까이 되는 의자 중에 편한 것은 한 개도 없다. 오죽하면 베란다를 넘나들기 위해 산 사다가의 발받침 부분이 훨씬 더 안락할 정도다. 의자에 앉아 있으면 앉아있을수록 엉덩이가 아프다. 엉덩이가 아프니까 눕게 되고, 눕다 보면 어영부영 잠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서재가 필요하다. 서재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서재가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남편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공유 공간 말고, 짧게라도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필요하다. 이미 작은 방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방이 된 것도 한몫한다. 책상 하나 더 들어간다고 크게 문제 될 것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작년 11월이다. 그때부터 내 장바구니는 서재를 겸한 나를 위한 공간을 채울 것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책상과 의자는 기본이고, 문구류 정리함과 벽에 걸 그림까지. 내 취향을 잔뜩 반영한 것들로 넘쳤다. 몇 번이나 할부 결제를 할 뻔했으나, 마지막 한가닥의 이성이 나를 겨우 붙잡았다.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는다.'라는 명언을 마음에 새기며, 내가 뭐라도 꾸준히 할 때 한 개씩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뒤로도 또다시 몇 번이나 충동 결제의 위기가 있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잘 넘어갔다.


그런데 오늘 망했다. 아주 망했다. 갑자기 찾아온 충동소비 요정을 나는 아주 격하게 환영해버렸다. 몇 개월 동안 굳건히 지켜오던 장바구니를 한꺼번에 결제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봐도 무엇인가에 홀린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오늘은 굉장히 바쁜 날이었다. 한가롭게 사고 싶은 물건들을 돌아볼 수 있던 그런 상황도 아니었다. 화장실도 참았다가 갈 만큼 꽤나 바쁜 하루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 바쁨이 일시적 소강상태가 됐을 때, 뭐라도 사고 싶은 마음이 아주 격하게 올라왔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일을 하는가. 그래. 맛있는 거 먹고, 사고 싶은 거 사려고 일하는 거지. 사버리자! 하고 몇 개월치의 장바구니를 한꺼번에 결제했다. 나는 당장 아무것도 없지만, 이번 달의 나와 다음 달의 내가, 그리고 다다음달과 다다 다음 달의 내가 힘을 합친다면 못할 것이 없다.


구매 버튼을 누르자마자 순간 이성이 되돌아오면서, 잠깐 취소를 고민했다. 그렇지만 구매 취소 버튼을 누르지는 않았다. 퇴사를 고민하면서 작업실을 얻는 것도 고민했던 나인데, 이 정도의 공간을 위한 소비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구매를 합리화해버렸다.


물론 그런 공간이 있다고 나의 생산성이 갑자기 향상되거나 나의 생활이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기대한다. 그런 것들이 가져올 아주 작은 도움을. 누누이 말했듯, 나는 너무나 게으르고 의지박약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책상이, 그런 의자가, 그런 키보드가 나를 아주 조금이나마 뭐라도 하게끔 만들어줄 것이다. 특히나 의자가 가져올 도움이 제일 기대가 된다. 내가 산 의자는 '서울대 의자'라는 거창한 별명을 갖고 있다. 혹시 나도 이 의자에 앉으면 서울대생처럼 공부를 잘하게 되는 걸까.


세상에 필요 없는 소비는 없겠지. 제발 없길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