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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기 Feb 10. 2022

회사원은 휴가 없이 어떻게 일상생활을 지속하는가

기록하는 2022년│Episode 11│2022.02.10

작년 말, 회사에 택배보관실이 생겼다. 원래는 1층 인포데스크 쪽에 쌓아뒀다. 찾아갈 때만 목록에 서명을 하고 자유롭게 찾아갈 수 있었다. 한국인의 특성 덕분인지 자율 택배 시스템을 이용하는 5년 가까이 단 한 번의 문제도 나에게는 발생하지 않았다. 한 번, 잠깐의 분실이 있을 뻔도 했으나 내 물건을 잘못 가져간 분이 황급히 가져다준 덕분에 결과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나만 그랬던 걸까. 아니다. 주변 선배들한테 물어봐도 기존의 택배 시스템이 불편하다거나 분실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냥 사람들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그 시스템을 믿기 어려운 건가. 그건 그럴 수 있겠다. 어쨌든 잘 운영되던 자율 택배 시스템이 없어지고, 지하 1층에 새로운 택배보관실이 생겼다.


택배 보관실은 9시에 열고 저녁 6시에 닫는다. 딱 내 근무 시간과 겹친다. 점심시간도 있다. 그 시간 역시 내 점심시간과 겹친다. 단 1분의 오차 없이 운영된다. 오늘은 꽤나 바쁜 날이었다. 근무 중 자리를 비울 수 없었고, 결국 6시가 넘었다. 나는 택배를 찾지 못했다. 오늘은 얼마 전에 주문한 무선 기계식 키보드가 배송된 날이다. 계획대로라면 지금 새로운 키보드의 키감을 느끼며 즐겁게 일기를 쓰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다. 배송된 택배를 못 찾았기 때문이다.


9층에서 근무하다가 지하 1층의 택배 보관실을 잠깐 들리는 것이 도대체 얼마나 큰 일인데 이렇게 오버하냐고 할 수 있겠다. 맞다. 달린다면 십 분이면 끝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바쁜 날을 그럴 시간조차 없는 거 아닌가. 10분의 시간조차 내기 어려운, 마음의 여유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이 없는 거 아닌가. 다들 그런 거 아닌가. 화장실 갈 시간도 참고, 점심도 자리에서 먹고. 야근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맞다. 야근하기 싫다. 그리고 야근으로 미룰 수도 없다. 내 업무 특성상 무조건 야근으로 미루기 어려운 것들이 종종 있다. 거래처 근무 시간에 맞춰 통화하고, 확인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10일, 오늘 같은 날들의 앞 뒤로는 꽤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회사로 택배를 안 시키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맞다. 회사로 택배를 안 시키면 된다. 이 모든 것은 (내 기준) 고가의 무선 기계식 키보드를 집으로 시켰다가 분실될까 봐 걱정된 나머지 생각 없이 회사로 시켰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키보드를 안 샀으면 됐고, 또 애초에 저렇게 불편한 택배보관실을 만들지 않았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맞다. 지금 화가 가득 난 마음으로 일기를 쓰고 있다.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대했는데! 오늘 배송된다는 문자를 받고 얼마나 설렜는데! 토독토독, 새로운 키보드를 누르는 생각을 하루 종일 했는데! 너무 바빴고, 찾지 못한 나 스스로에게 화가 난다.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잠깐 가져오지도 못했는가. 도대체 뭐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한다고!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다. 회사원인 나는 대체 휴가 없이 어떻게 일상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건가. 나만 이렇게 빡빡한가. 특히 작년 10월 집을 구매할 때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 생각을 했다. 은행에 한 번 가려고 해도 대기 시간을 포함하면 1시간을 훌쩍 넘는다. 주택금융공사와 상담을 한 번 하려고 해도 30분은 지나간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주민센터를 방문하려면 2시간은 기본이다. 집을 2-3곳 보려면 하루가 필요하다. 집을 본다는 특수상황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출근과 퇴근 시간을 피해서 갈 수 없다. 그렇다고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가려고 하면, 내가 가려고 하는 모든 곳이 점심시간이다. 당연하다. 모두 잘 먹고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거니까. 위의 모든 일을 하기 위해서는 휴가가 필요하다. 여유로운 전시 관람이나 한적한 카페에서 따사로운 햇빛 보며 커피 한 잔 같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냥 아주 기본의 일상생활을 지속하는 것에 대한 바람이다. 물론 이런 고민 자체가 행복한 고민일 수 있다. 그리고 사실 반차가 없던 작년과 비교하자면, 지금은 반차가 생긴 것만으로 훨씬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그냥 궁금했을 뿐이다. 회사원인 나는 대체 휴가 없이 어떻게 일상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건가.


그냥 이 모든 것은 배송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키보드가 배송이 되었음에도, 택배보관실을 가지 못해서 찾지 못하고, 만나지 못한 나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이다. 내일은 꼭 찾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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