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2022년│Episode 44│2022.03.16
(오늘은 유독 사진이 많다. 하루 종일 반짝거리는 것들을 넘치게 봤기 때문이다. 담아두고 싶다.)
어제 두드러기의 여파인지 갑자기 하루쯤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이번 주는 한 달 중 제일 덜 바쁜 주간이다. 갑작스럽지만 휴가를 내보기로 한다. 특별한 목적 없이, 남편과 일정을 맞추지 않은 휴가는 오랜만이다. 하고 싶은 것들을 적어본다.
- 하루 종일 자기
- 광합성하기
- 친구의 새로운 공간 놀러 가기
- 가고 싶었던 곳 가기(서울공예박물관, 서울식물원)
- 하루 종일 걷기
- 도예 클래스 듣기
- 밀린 영상 편집하기
하루의 휴가로는 택도 없는 것들이다. 욕심부리지 말고, 일어나서 제일 하고 싶은 일부터 해보기로 한다.
일어났다. 남편은 출근했고, 10시가 다 되었다. 오늘의 하루를 충분히 누리기에 너무 늦게 일어난 것 같다. 이럴 거면 반차를 쓸걸. 반차와 다를 것이 없다. 순간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조급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어제 분명 오늘 하루에 대해 욕심부리지 않기로 했다. 잊지 말아야지. 벌떡 일어나는 대신 기지개를 쭉 켠다. 침대 위로 비치는 따스한 햇살이 좋다.
물을 먹으려고 냉장고를 연다. 홍어 냄새가 진동을 한다. 얼마 전에 어머님이 보내주신 홍어다. 배불리 먹고도 조금 남아서 우선 냉장고에 넣어두었는데 이제는 어떻게든 처리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다. 홍어전을 부쳐놓기로 한다. 부침가루를 묻히고, 계란물을 풀어 홍어전을 부치기 시작한다.
홍어전은 예전에 엄마가 부쳐준 적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별미였다. 그리고 부쳐서 냉동실에 넣어두면 보관도 오래된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양만큼만 꺼내서 데워먹으면 된다. 갑작스러운 전 부치기에 주방이 난리가 났지만 애써 모른 척한다. 대신 따끈따끈한 홍어전과 비빔국수를 말아 이른 점심을 먹는다.
점심을 먹고 씻는다. 뭘 할까 싶다. 우선 친구의 새로운 공간에 놀러 가기로 한다. 친구는 얼마 전 충무로역 근처에 <YPC SPACE>라는 공간을 만들었다. 친구가 오늘 거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한 번 가보기로 한다. 가는 길에 리치몬드 과자점에 들러 공주 밤 파이를 산다. 밤 파이는 정말 맛있다. 밤 알이 통으로 한 알씩 들어있는데 고소하고 맛있다. 친구도 좋아하면 좋겠다. 안국역 근처에 주차를 하고 지하철을 탄다. 지하철은 꽤 오랜만이다. 지하철 역 안 꽃집에서 해바라기를 다섯 송이 샀다. 사진으로 먼저 본 친구의 공간에서 왜인지 모르게 해바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충무로 역에 내렸다. <YPC SPACE>는 서울시 중구 퇴계로 258, 4층에 있다. 충무로역 1번 출구로 나와서 5분 정도 걸으면 된다.
현재는 'OPENING CEREMONY' 중이다. 이 공간이 만들어진 계기와 만들어지기 위한 과정이 담긴 친구의 글을 읽으면서 전시를 보고, 공간을 봤다. 전시와 공간 모두 친구와 닮아있었다. 나는 특히 임효진 작가의 작품들이 인상 깊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각자의 의미대로 다가갈 테니 기왕이면 직접 가서 보는 것을 추천하며 전시나 공간의 사진은 올리지 않는다. 대신 공간 창문 밖으로 만난 소나무 사진을 한 장 남긴다. 전시장에 간다면 꼭 창문을 열어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소나무를 한 번씩 보면 좋겠다.
미리 계획하고 간 것이 아니라 혹시 일정을 못 맞추면 친구가 불편할까 봐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친구를 못 보더라도 친구의 공간이라도 보고 오자고 갔는데 신기하게 친구는 거기에 있었다. 매주 수요일마다 그 공간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오랜만에 본 친구의 얼굴은 밝게 빛났다. 시기가 시기인만큼 예전처럼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언제든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 길을 만들어가는 친구를 보며 늘 많이 배운다. 친구가 그려가는 일 모두 잘 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친구의 공간을 나와 충무로역을 향해 걷는다. 길가에 핀 꽃들이 예쁘다. 잠시 멈춰 꽃들을 가만 들여다본다.
이렇게 존재만으로 행복을 줄 수 있다니. 꽃은 정말 대단하다. 이따 집에 들어가기 전 꽃 몇 송이 사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순간 눈앞에 '진양 꽃 상가'가 보인다. 여기에 원래 꽃 상가가 있었나.
남대문 시장과 고속터미널 쪽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충무로 한가운데에 있다니. 들어가 보기로 한다.
진양 꽃 상가는 3층에 있다고 하는데 들어가는 입구를 한참 못 찾아서 빙빙 돌다가 겨우 입구를 찾았다. 충무로역에서 바로 보이는 에스컬레이터가 아니라 건물 중간쯤으로 돌아 들어와야 입구다.
3층까지 걸어간다. 이른 시간이 아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은 없다. 꽃을 조금 샀다.
산 꽃을 들고 다시 안국역으로 돌아왔다. 목이 마르다. 평소 가고 싶었던 <카페 텅>에 가보기로 한다. 안국역 4번 출구로 나와 2분 정도 걸으면 된다. 이름도 예쁜 로열 창덕궁 빌딩 7층에 위치해있다.
사람이 많아 카페 내부의 사진은 찍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창가에 자리는 있었고, 창 밖으로 보이는 창덕궁을 보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셨다. 주말이라면 와 볼 생각조차 못했을 텐데 평일이라 조금 쉬웠다. 이렇게 오고 싶었던 곳에 와서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평일이란. 새삼 좋다. 더욱 격렬하게 일을 하고 싶지 않아 진다. 그렇지만 내가 일을 하니까 이렇게 여기에 와서 커피라도 사 먹을 수 있는 거겠지.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아 본다.
커피를 다 마시고 '서울공예박물관'으로 향한다. 예약제로 운영되다가 최근에 예약 없이 자유로운 전시 관람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물론 주말은 여전히 예약을 해야 관람이 가능하다.)
이번에 처음 가본 서울공예박물관은 좋았다. 전시관에서 괜히 인상 깊었던 문구 두 개를 남겨본다.
"가방에 붙어 다니는 동사는 넣다와 메다 뿐이지만... 보자기에는 이렇게 싸다, 메다, 가리다, 덮다, 깔다, 들다, 이다, 차다와 같이 가변적으로 복잡적인 무수한 동사들이 따라다닌다."
(이어령, <보자기 문명론> 中)
"나는 수집가로서 보람을 느낀다.. (중략)... 수집에는 사람을 순순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 힘이 사회가 국자, 더 거창하게는 인류에 공헌하고자 하는 큰 마음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허동화, <수집, 발품 팔고, 공 들이고> 中 )
공예박물관의 작품을 보는 것이 당연히 좋았지만 오늘은 공간들도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공간의 휴게 공간이나 공간의 빈 공간들이 좋았다. 나는 이상하게 이런 공간들에 마음을 유독 빼앗긴다.
나는 전시관의 기념품 샵도 좋아한다. 특히 서울공예박물관 가게에는 예쁜 것들이 많아 하마터면 지갑을 털릴 뻔했다. 가까스로 잘 참고 엽서 한 세트를 구입했다.
바깥으로 나와 박물관에 마당에 앉는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텅 빈 공간에서 마음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어느덧 5시가 넘었다.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이다. 이 동네는 올 때마다 마음이 한없이 현혹된다. 언젠간 이곳으로 꼭 이사 오리라는 다짐을 오늘도 한다. 그냥 집에 가기는 아쉬워서 무엇인가 사가기로 한다. 요즘 제일 핫하다는 '런던 베이글 뮤지엄'에 들려볼까 하다가 솔드아웃되었다는 소식에 '레이어드'로 걸음을 옮긴다. 나는 도대체 언제쯤 '런던 베이글 뮤지엄'에 가볼 수 있을까.
언제 와도 귀여운 이곳에서 '말차 홈메이드 치즈케이크'와 '프레쉬 밀크 크림 스콘'을 하나씩 포장했다. 든든하게 빵을 사서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길에 공사 중인 곳을 만난다. 여기는 또 어떤 공간이 될까. 기대가 된다.
집에 왔다. 진양 꽃 상가에서 구입한 꽃을 정리해 화병에 옮겨 담는다. 나는 분명 무채색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화려한 색을 좋아하고 있다. 가득한 주황색, 보라색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다.
퇴근하고 온 남편을 집 앞에서 만나 갈비를 먹었다. 달짝지근한 양념돼지갈비는 언제나 최고의 선택이다.
다시 집으로 와서 남편이 내린 커피와 사온 빵을 먹는다. 들고 오다가 봉투를 놓치는 바람에 기대했던 '말차 홈메이드 치즈케이크'가 엉망이 됐다. 그래서 그런지 카페에서 먹었을 때보다 덜 맛있는 기분이다.
꽤 아름다운 하루였다. 하고 싶었던 일의 대부분을 하지 못했고, 되는대로 옮겨 다녔던 하루다. 하지만 그 자체로 충분히 너무 좋았다. 날씨는 따뜻했고, 오랜만에 걸었던 서울은 즐거웠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빈틈 많은 하루의 휴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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