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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기 Mar 24. 2022

좋은 선배들과의 좋은 저녁

기록하는 2022년│Episode 50│2022.03.22

올 초 회사를 그만둔다고 말했다가 다시 다니기로 했다. 그리고 열심히 다니고 있는 요즘, 회사에서 내 별명은 '김번복'이다. 선배들은 툭하면 나를 놀리지만, 나는 오히려 좋다. 어딘가 좀 민망한 상황에서 아무도 모른척했다면 더 민망했을 것 같다. 모른 척 쉬쉬해주는 대신 매일 나를 놀리는 선배들 덕분에 어느 순간 그냥 '길가다가 대자로 넘어져서 바지 찢어졌어' 정도의 에피소드가 됐다.


나의 번복 사건 이후 선배들은 조만간 놀림의 장을 만들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오미크론의 확산과 선배들의 연이은 확진으로 인해 놀림의 장은 계속 무산됐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났고, 놀림의 장 존재 자체도 까먹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주, 한 선배가 은밀하게 이야기한다.


"다음 주 화요일. 봄맞이 쭈꾸미 환영식. 오케이?"

"네ㅔㅔㅔㅔㅔ 콜입니다!"


정말 오랜만의 저녁이다. 특히 이렇게 마음 맞는 사람들과의 즐거운 저녁은 언제나 환영이다. 퇴근하자마자 공덕역 '소문난 쭈꾸미'로 달려간다. 제철 맞은 쭈꾸미는 오동통하고 부드럽다.

평소 샤브샤브를 좋아하는 난 철판 볶음이 처음이었는데 꽤 매력적이었다. 미나리 향 가득한 짭조름한 양념이 식욕을 돋웠다. 첫 잔을 채우고 짠 하자마자 한 선배가 큰 소리로 외친다. 


"오늘은 김번복씨의 번복을 놀리기 위해 마련된 자리임을 잊지 말고 끝까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그랬다. 오늘은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성사된 내 놀림의 장이었던 것이다. 첫 짠 이후로는 놀림 한 마디와 짠, 다시 놀림 한마디와 짠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놀림의 장은 2차, 3차로 이어졌다. 

2차에는 육회를 먹고, 3차 때는 마른안주를 먹었다. 11시까지 시간을 꽉 채우고, 뱃속까지 꽉 채웠다. 


그 시간 내내 우리는 회사를 다니면서 즐거웠던 시간, 힘들었던 시간들에 대해 나눴다. 나라고 뭐 특별해서 퇴사를 고민을 했을까. 그냥 보통의 고민들이었다. 나보다 한 발 먼저 이 길을 가고 있는 선배들 역시 나와 똑같은 고민을 했다. 이 저녁을 함께 한 선배들은 내가 만났던 문제들을 똑같이 만났던 사람들이다. 문제를 만났을 때 때로는 이겨내고, 때로는 돌아가면서 그 자리까지 간 사람들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철없는 나를 이해해주고, 실수 투성이인 나를 감싸준다. 잘못된 길을 갈 때면 때로는 적극적으로 말려주고, 때로는 넘어지더라도 가보길 응원해줬다. 그런 사람들 덕분에 오늘 내가 이렇게 맛있는 쭈꾸미를 먹고 있는 것이다.


11시. 어느덧 헤어질 시간이다. 잔뜩 흥겨운 선배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분명 시작은 내 놀림의 장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잊은 지 오래다. 모두가 신나 있다. 선배들의 신나 있는 모습이 좋다가 이내 짠하다. 이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는 잘 모르겠다. 뭔가 안쓰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선배들이라고 인생이, 그리고 회사 생활이 쉬운 것은 아닐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를 신경 써 주고 챙겨줄 수 있다는 그들의 마음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 물론 "너는 핑계고 사실 술이 먹고 싶었다."라고 말하는 선배들이고,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따뜻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회사를 떠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사람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다. 좋은 선배들과 좋은 저녁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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