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술 타고 여행을 떠나요.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아침부터 이곳은 어제와는 다른 분주한 모습이었다. 우연히 숙소에 머물고 있던 모든 팀이 한 번에 퇴실하는 바람에 아침부터 주인은 비용을 계산하고 서류를 적어대느라 정신이 없어 보인다. 우린 이곳 아바나에서 조금 떨어진 '비냘레스'라고 하는 도시로 이동할 계획이다. 물론 아무런 정보도 없고 아직 예약하나 해 놓은 게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어차피 가면 모두 해결되겠지 하는 생각이다.
복작거리던 숙소를 나와 며칠 전 혁명광장으로 가면서 지나가 본 적 있는 차이나 게이트를 다시 한번 지나면서 중국과 쿠바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었다. 걷다 보면 조금 이색적인 모양의 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 나온다. 스페인이나 유럽 국가의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은 건물이 아바나 시내를 차지하고 있다면 이곳은 지붕에 기와를 얹은 다소 동양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면 바로 그곳이 차이나 게이트 입구이다.
우리가 찾던 버스 정류장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는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있는데, 버스를 몇 번 타본 적이 있다고, 오히려 숙소에서 예약해주는 택시를 타고 가는 것보다 훨씬 저렴한 현지의 시내버스를 자주 이용했었다.
오늘도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가기 위해 일단 밖으로 나왔는데, 날씨가 너무나도 좋다. 파랗게 느껴지는 하늘을 머리에 이고 정류장까지 도착했다. 시내를 지나다니고 있는 버스는 아바나를 돌아보며 만났던 그 어떤 차들보다 훨씬 깨끗하고, 현대적이었다.
바로 정류장에 들어오는 버스에 올라서 빠르게 지나는 아바나의 풍경을 지켜봤다. 아바나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마저 다 보지 못하고 지나갈 뻔했던 몇 곳의 모습을 흥미롭게 보다 보니 어느새 터미널에 도착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터미널로 가는 길 위에 세워 주셨다. 버스가 멈춰 서자, 우리가 어리숙한 티가 나는 건지, 아니면 이곳에 오는 모든 사람들은 버스 터미널로 가는 사람이라 확신이 있었는지, 어디서도 모를 수많은 호객꾼들이 달려들어 우리에게 "악마의 속삭임"을 건넨다.
"우린 딱 4명만 출발해, 너희가 두 명이면 지금 기다리고 있는 두 명과 함께 출발할 수 있어."
"그래?"
"당연하지, 게다가 가격은 비 아술(시외버스) 보다 싸니까 우리 택시 타고 가"
"우린 일단 터미널에 들어갔다가 다시 만나자"
"아니 안돼. 여기 일하는 애들이 얼굴 알아서 손님 빼 간다고 싫어해"
"그래도 우린 들어가야 하니까 비켜줄래?"
그랬더니 그 소년은 잠시 비켜주는 것 같더니 우릴 따라 들어오면서 호객행위를 쏟아 냈다. 나중엔 말이 빨라지면서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하는 바람에 스페인어가 짧은 나는 거의 알아듣기 힘드렀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실내로 들어와 버려서 그랬지 우리가 나갈 여지를 주지 않아서 그런지 넓은 홀 앞에선 더 이상 가까지 다가오질 않았다.
우린 서로의 일은 했다. 여행자는 여행을 하고자 했고, 호객꾼은 어떻게든 광고를 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했다. 하지만 아직도 현지 물가 모르는 외지인 두 명은 그들의 뀜에 넘어갈 수가 없다. 이집트를 여행할 때였다. 피라미드를 보러 들어간 공원 내부에는 자신이 해설사라고 하는 명찰을 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일단 그들을 따돌리고 입장하는 것만 해도 진이 빠지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낙타꾼들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도 선의는 찾아볼 수 없다. 이집트의 화폐단위와 영국 화폐 단위의 명칭이 같아서 만들어 내는 사기극이 발생한다. 이집트 돈으로 200 파운드라고 하면서 낙타를 태우지만, 내릴 때는 영국 파운드라고 하면서 거의 20만 원이 넘는 돈을 요구한다.
각자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일을 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다. 생업이 달려있다면 더욱 그렇다. 여행 중에 이런 상황이 닥친다면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거의 거절만 하고 돌아 선다. 하지만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이 생기면 그냥 거절만 하고 돌아서지 않는다.
다행히도 우리 앞에 있던 소년은 더 이상 다가오지도 물러서지도 않고 그 자리에 멈춰서 있다. 마음이 생긴다고 뭐든 다 들어줄 수 없는 것이니 딱히 미안하지 않다. 지금은 나도 나의 일을 하는 중이니까 말이다.
집을 놓고 표를 살 수 있는 직원 앞으로 만들어진 긴 줄에 섰다. 직원은 작은 부스에 앉아 언제 적 컴퓨터인지 모를 뚱뚱한 브라운관 모니터 앞에 열심히 표를 발권하고 있다. 프린트는 내가 아주 어릴 적 병원에서 쓰는 양 옆에 구멍이 있는 용지에 인쇄하는 기계였다.
"지지직 찍찌직"
하는 소리에 종이가 조금씩 밀려올라 온다. 잉크가 묻은 펜과 같은 촉이 좌우로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하더니 그제야 한 장의 표가 나온다. 이런 속도니 줄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더운 여름 날씨에 전장에 달려있는 커다란 펜 하나에 의지해 몸을 식혔다.
몇 분 후, 받아 든 하얀 좋이 위로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글씨체의 버스표가 나왔다. 나름 정교하게 좌우를 횡보하더니 아래위 간격은 맞지도 않다. 차에 오르면 이내 주머니로 들어가 버려, 다시는 그 쓸모를 하지 못하는 버스표이지만, 손에 들고 있을 땐 든든해진다. 기사님께 보여주고 어디로든 갈 수 있으니 말이다.
놀랍게도 버스는 정시에 출발한다. 더 놀라운 것은 버스에 오르면 좌석번호가 있는 지정석이라는 것이다, 중남미를 여행하면서 규칙을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정시에 출발하는 버스는 있어도 정시에 도착하는 버스는 없고, 자리가 지정석이라고 해도 누군가는 이미 내 자리에 앉아있는 이상한 일이 자주 있었는데, 이 버스 위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
버스를 타는 사람이 모두 다른 나라의 여행객이라 그런지 모르겠다. 이곳의 시외버스는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쿠바 시민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가 있고, 이곳 비아술이라고 하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여행자 전용의 버스가 있다. 아무래도 외국인들을 위한 버스다 보니, 지정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번호가 붙은 자리에 앉아 쿠바에서 처음으로 해보는 버스 여행의 길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는 고속도로로 진입했고, 안정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대로 잘 도착하면 여행이 아니지.
밖이 소란하더니 이내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날이 밝은데 비가 오는 것을 보니 아마 지나는 비 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 잠시 지나는 비가 갑자기 내 자리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운치 있는 버스여행이었다. 처음엔 몇 방울이 떨어지더니 나중엔 물이 타고 내려온다.
임시로 다른 버스기사님 (남미의 버스는 대부분 기사님이 두 분이시다. 운전도 서로 번갈아 하기도 하고, 짐도 내려주시는 일을 하신다.) 자리와 바꾸게 되었다. 기사님이 그 자리에 있으면 나중에 운전할 때가 걱정이 되면서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버스는 작은 마을 한적한 식당에 정차를 했는데, 그 사이 말도 안 되게 날이 맑아지는 바람에 젖은 바지를 입고 있는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점심을 먹고 출발해야 했는데, 그 사이에 마를 것 같지는 않았다.
밖으로 다니면서 산책도 하고 휴식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다시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오전에 출발했던 우리는 오후 늦은 시간 전에 도착했다. 점심을 간단히 먹었고, 숙소를 찾아 짐을 풀고 나면 비냘레스의 몇일의 여행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