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기웃기웃
물자가 여전히 부족하고 공산품이 많이 만들어질 수 없는 쿠바에서 마트를 들어간다는 것은 나름 비범한 각오를 다지며 들어가야 한다.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으니 비범한 각오보다는 미리 필요한 건 없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들어가면 좋다. 물건이 귀하게 들어오다 보니 줄을 서서 들어가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문 밖을 지키고 서 있는 직원에 통제가 되어 있다.
막상 매장에 들어가서도 실망할지도 모른다. 비냘레스 제일 큰 매장을 찾아 들어가 봤지만 역시나 였다. 아바나에 있는 큰 건물 지하 마트를 갔을 때, 한국의 동네 마트 정도의 규모를 경험했기 때문이었을까? 이곳의 상황이 더 열악해 보이기도 하다.
관광객이라도 매장을 들어가려면 줄을 서 있어야 했다. 누구나 다 평등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 차례가 되어 들어가 가게를 둘러봤다. 사정상 사진을 찍을 수 없어 남아 낼 수는 없지만, 설명을 하자면 진열장은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생겼다. 하지만 진열된 상품이 다소 열악한 사정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매장에 냉장 식품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없어 그런 건지 유제품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유제품을 찾아다닌 이유는 따로 있다. 내가 쿠바에 들어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숙소에 변기 커버가 없어서 그랬는지 화장실 안부를 물어본 시간이 꾀나 오래 지났다. 그래서 마트만 보이면 들어가서 유제품 비슷한 걸 찾아 마시려 했지만,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도움 되는 제품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오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트 안을 들어왔는데, 역시나 냉장고는 보이지 않고, 유제품은 찾아볼 수 없다. 호기심에 다른 제품이 뭐가 있나 둘러보며 매장을 돌아보다, 우연히 반가운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가루로 된 우유였다. 무엇을 고민할까? 바로 집어 들었다.
어렸을 땐 몰래 많이 먹었다. 사촌들과 나이차가 있었던 나는 이모집에 놀러 가면 몰래 분유를 한 숟가락씩 퍼 먹었던 기억이 있다. 먹다 보면 늘 입가에 묻어 있는 가루에 들켜 혼나고, 그 벌로 동생 밥 다 먹을 때까지 젖병을 들고 있어야 헸다. 팔이 아프고 저렸지만 동생의 입이 쪽쪽 거릴 때마다 신기해 아픈 줄도 모르고 들고 있었다.
이젠 눈치 안 보고 우유 가루를 퍼 먹을 수 있다. 물론 집에 있을 땐 분유를 일부러 사서 먹은 적은 없다. 하지만 여기선 왜 그랬는지 '내 돈 내 산' 우유 가루를 뿌듯하게 들어 숙소로 들어왔다. 미리 사둔 물이 한통이 있어서 컵에 물을 넣고, 가루 세 숟가락 넣으면서 저었더니 그럴듯하게 우유 비슷한 색이 난다. 얼른 한 모금 마셨더니 맛이 조금 싱거운 우유 맛이라 크게 한 숟가락 더 넣어서 저었더니 이제야 제법 우유랑 같은 맛이 나기 시작했다.
우유 맛이 나는 물은 한 컵 시원하게 들이켜 돌아서며, 입안에 남은 우유에 입맛을 다셨다. 아쉬운 눈빛을 쏘며 남은 우유 가루를 잘 닫아 테이블 한쪽으로 치워 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다시 들어와서 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일단 한 컵만 마시고 나왔다.
오늘은 하루 종일 하는 거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녔다. 아침 산책길엔 조금 흐린 날씨구나 하며 다녔는데, 슬슬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뭘 하고 싶은 게 없다. 그저 내리는 비를 보고 싶다. 어디서 여행하든 특별히 이동하는 날이 아니라면 그냥 하루 종일 비 오는 거 보면서 놀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래서 쉬는 김에 비가 온다는 핑계를 대고 식당에 앉아 음료 하나 주문해서 마셨다.
음료를 마시며 가게를 둘러보니, 식당에 있는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우리가 이곳에 온 날에 산책을 하다가 본 연기가 피어오른다. 고기를 굽기 위한 불인데, 일단 불이 오르고 조금 잦아들어고 나면 숯불이 빠알갛게 달아오른다. 그러면 그 위에 고기를 얹어 구우면 된다.
우리도 이곳에 앉아 비를 본 값으로 메뉴를 골라 본다. 가장 무난한 치킨을 하나 사서 집에 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한 끼를 먹었으니 오늘은 밖에서 먹고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비가 오면서 낮아진 온도에 더 견디지 못하고, 포장해서 숙소로 돌아와 먹기로 했다.
숯불에 올라가 있는 우리의 치킨요리를 기다린다. 오늘 하루는 뒹굴 거리면서 놀기 좋았다. 아침부터 분주함 없이 편안한 걸음으로 다니다 보니 어느새 저녁시간이 되었고, 거리의 노천카페에는 각국의 사람들이 우리처럼 앉아서 시간을 보낸다.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가지거나 감자튀김처럼 간단한 스낵을 시켜두고 맥주 한잔씩 마시는 중이었다.
우리도 그 틈에 끼여 같은 여유를 즐겼다. 그 사이 우리가 주문한 구워진 닭이 나왔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우린 최선을 다해 즐기다가 보니, 어느새 비가 그친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숯불 향이 가득 밴 저녁을 집어 들고 나왔다.
역시나 숙소는 따뜻하고, 이제는 어색함보다는 안락함을 전해준다. 벌써 집이라는 느낌이 드는 곳이 되었다. 아바나 클럽의 럼주에 이곳에서만 생산되는 콜라 같은 음료를 올려둔 식탁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우리는 작은 잔을 찾아 서로의 잔에 익숙해진 쿠바를 채워 입에 털어 넣고. 식당에서 방금 사와 따뜻한 온기를 담은 전통 쿠바식 요리를 한 점씩 먹었다.
여행의 하루가, 그리고 비 오는 쿠바의 어느 날은 이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역시 빠질 수 없는 아바나 클럽과 함께.